「캣맘은 왜 공감을 잃었나」라는 칼럼이 화제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굳어진 혐오 담론이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거쳐 언론 칼럼으로 세탁되는 과정이 이 글에 그대로 드러난다.
칼럼은 캣맘 갈등의 배경으로 울음소리와 악취, 차량 훼손과 함께 ‘생태계 교란’을 든다. 얼마 전 유튜버 새덕후가 「고양이, 이젠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를 올린 뒤 남초 커뮤니티에서 확산된 담론과 같다.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는 캣맘 대상 사체 전시 테러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한 바 있다. 가해자의 글에는 “약한 개체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캣맘들은 인간소외 심리를 갖고 있다”, “잉여” 같은 표현이 반복됐다.
박 교수의 정리는 이렇다. “정작 나는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동물이 돌봄을 받는 것에 대해서 김씨는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김재현 기자가 말한 “먹고살 만한 나라가 되면서 공공의 안전보다 동물에 대한 개인 감정을 우선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정확히 그 원한과 같은 결의 문장이다. 표현이 다듬어졌을 뿐, 감정의 뿌리는 같다.
김 기자는 캣맘 현상을 “풍요의 시대가 만든 현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캣맘의 상당수는 자기 노후를 걱정하면서도 사료를 사고, 자기 시간을 들여 포획을 하고, 수술비를 나눠 내는 중•노년 여성들이다. 캣맘 활동은 사회복지 공백의 뒷수습이며, 국가의 자원 배분이 실패한 자리를 여성의 무급노동이 감당하는 일이다. 이것을 “풍요의 시대가 낳은 감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박지선 교수가 짚은 그 원한의 언어다.
김 기자는 캣맘이 “집으로 데려가 끝까지 책임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비판한다. TNR이 뭔지 모르는 이야기다.
TNR(Trap-Neuter-Return)은 길고양이의 자연 소멸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잡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중성화 후 방사해 개체수가 자연스럽게 감소하도록 유도한다. 효과는 중성화 커버리지에 달려 있고, 커버리지가 낮은 이유는 예산 부족이다. 그 예산의 공백을 캣맘들이 자기 돈과 시간으로 감당하고 있다.
정작 무책임한 사람은 따로 있다. 브리더와 펫샵이 수요를 끊임없이 공급으로 바꾸고, 그 공급의 일부가 거리로 흘러나온다. 왜 거리에 고양이가 끊이지 않는가? 사람들이 버려서 그렇다. 산 꼭대기의 고양이도, 원래 고양이가 없던 섬의 고양이도, 사람이 그곳에 버려서 있는 것이다.
김 기자는 캣맘을 “가장 적은 책임으로 가장 큰 도덕적 만족을 얻기 쉬운 대상”을 고른 사람들로 규정한다. 이 진단은 캣맘 활동을 유아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축소한다. 그러나 실제 활동은 감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급식소 위치를 정하고, 포획틀을 놓고, 마취 스케줄을 짜고, 수술 후 회복을 관리하고, 이웃과 협의하고, 지자체와 협업한다. 이것을 “가장 적은 책임”으로 부르는 것은, 여성의 노동을 감정으로 격하해 온 오래된 습관이다.
김 기자는 “개인이 선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공공의 규칙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 자체에는 반박할 게 없다. 그러나 이 원칙이 캣맘을 향하는 것은 궤변이다. 진짜 공공의 규칙이 필요한 곳은 다른 곳이다. 브리더와 펫샵 규제, 유기 처벌 강화, 유기묘 보호소, TNR 예산 확대. 이 규칙이 부재한 자리를 캣맘의 사비와 시간이 대신 채운다. 김 기자의 글은 이 부재한 공공은 언급하지 않고, 뒷수습을 하는 캣맘에게 “공공을 사유화한다”고 선동한다. 정확히 반대다. 개인이 자기 돈을 털어 공동체가 부담해야 할 몫을 대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식의 왜곡선동은 우연이 아니다. 남초 커뮤니티의 길고양이 혐오 담론을 분석한 이진(2022)의 연구는, 이 담론이 “남성들이 누려온 기득권을 빼앗아 가는 페미니즘과 여성의 인권 가시성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남성성의 위기가 복합적으로 결합한 형태”라고 정리했다.
“시민사회의 요구”라고 인용한 ‘캣맘금지법’청원도 같은 흐름 안에 있다. ‘털바퀴’라는 노골적 혐오의 말이 일상어가 된 것도 최근이다. 이 말에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여성, 캣맘, 페미니스트가 늘 함께 묶여 있다. 이 담론이 국회 청원으로 정제되고, 다시 연합뉴스 칼럼으로 세탁되어 나온다.
동물에 대한 혐오는 좀처럼 동물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으로 번지고, 그 사람이 속한 집단으로 번진다. 한 종에 대한 배제와 살처분의 명분이 한 번 허용되면, 그 명분은 다른 곳에서도 쓰인다. 역사는 그 끝을 여러 번 보여줬다.
나는 새를 사랑한다. 도심에서 함께 살아가는 비둘기와 참새, 까치와 까마귀, 왜가리, 최근에는 황조롱이와 부엉이까지 우리 곁에 왔다. 이들이 인간이 만든 도시 안에서 어떻게 하면 계속 행복할 수 있을지 늘 궁금하고 신경 쓴다. 고양이에 대해서 그렇듯이 말이다.
새를 사랑한다면 고양이도 사랑해라.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라.공존 좀 하면서 살자. 제발.
“왜 우리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고요.”
모두가 가해자들의 미래를 생각해줄 때, 피해자들은 말을 아끼고 체념을 하고 설명할 의지를 잃는다
가해자들이 당당하게 혐오할 때, 피해자들은 본인의 행동이 혐오의 정당화가 될까 싶어 자기검열을 한다
이 학생들은 누가 보호해주지
배재고 사건이 이 땅에서 일어난 혐오사건 치고는 꽤나 발빠르게 조치되고있어서 들여다보니
<야구계가 원래 호남권 중심+광주일고가 역대 프로야구선수 많이 배출한 야구 명문+배재고는 자사고명문이긴 하지만 야구쪽에서는 듣보라서 비호할 세력이 없음> 인 결과라서 좀 씁쓸하군. 현실과 다른 자체 세계관이 있는 분야의 사건이라 조치도 빨랐던 것.
그 난리치던 스벅도 슬금슬금 다시 가고 올림픽공원 무단점거도 그냥 봐주는 현실과 다른 단호한 조치에 충격받은 극우세계관의 분노댓글들.
우리는 세상이 평평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현실과 달리 그라운드는 기울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라운드만큼은 평평해야 스포츠는 이유가 됩니다. 현생의 뉴스와 온라인의 세상이 조롱과 멸칭이 흘러넘쳐도 우리의 그라운드는 늘 평평해야 합니다. 스포츠는 스포츠 다울 때 우리의 응원도 가치를 얻습니다.
-260702 권성욱 캐스터 오프닝 멘트
광주일고가 당한 수모는 배재고 한 번이 아니었다. 충암고가 있었고, 더 심각했다.
충암고 1학년이 광주일고 선수들을 향해 "내란의 요람"이라 외쳤다고 한다. 전두환이나 윤석열의 내란이 아니라, 5.18을 내란이라 부른 거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내란이라 부르며 시민을 학살했다. 그것을 바로잡는데 수십 년이 걸렸는데, 그 이야기가 야구장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5.18의 진상규명은 끝났다. 광주 망월동묘역은 국립묘지가 됐고,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한국 10대의 머릿속에서는 거꾸로 가고 있다. 5.18이 내란이라는 도식이 10대의 세계관에 자리잡고 있다. 단순한 비하 밈이 아니다. 농담의 일상화가 아니다. 역사 자체의 부정이 또래 공용 어휘로 들어선 거다. 그리고 그게 한두 명의 일탈이 아니라 야구부 더그아웃의 합창으로 드러났다.
이게 진짜 우려스러운 내란의 씨앗이다.
10대 안에서 극우 세계관은 이미 강고하고, 이미 주류화되어 있고, 이미 학교 단위 합창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배재고가 그랬고 충암고가 그랬다. 투표 성향이 드러나는 2030에 대한 우려는 늦었고, 10대에서 극우는 주류화 되었다.
그래서 내란청산은 끝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청산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1020 극우화에 대한 대처는 입법만으로 불충분하다. 극우는 인스타로, 쇼츠로 유포된다. 우리도 같은 경로로 접근해야 한다. 5.18의 진실과 한강의 문장이 10대의 화면에 뜨게 해야 한다. 우리 쪽 콘텐츠가 없으면 저쪽 콘텐츠가 전부가 된다. 지금까지 그랬다.
광주의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