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안다고 해서 많이 행하는 건 아니다. 지식을 그냥 전해주기보다 자근자근 잘 씹어 충분히 이해하도록 먹여야 행함으로 이어진다. 지식으로 지식을 전하는 건 강의에 가깝지만, 설교는 지식으로 삶을 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지식만 전하기 쉬운 변증설교로 삶을 전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
자기 중심이 단단한 사람은 남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관심이 없다.
신기한 건,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관심이 없으니 참견도 없고, 참견이 없으니 상처 줄 일도 없다. 무관심이 오히려 예의가 되는 역설.
본인 삶을 사는 데 에너지를 다 쓰기 때문에, 남을 판단할 여력이 남지 않는다. 동시에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눈치 보지 않는다.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각자의 몫이라 여긴다.
결국 단단함이란 남을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자기 삶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신경 쓸 곳이 분명한 사람은, 신경 쓰지 않을 곳도 분명하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가에 있어서 양심을 찌르는 허물들도 있지만, 태생부터 영혼에 심기워져 있던 악한 생명력인 악의, 악독, 욕망, 시기, 이기심, 자기의...이러한 죄들은 거듭난 사람에게도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지속적인 회개와 거룩하게 됨이 필요.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도는 주문에 가깝다. 하나님과의 기도는 대화여야 한다. 그 분이 좋아서, 신뢰해서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을 내 인생의 주관자로 인정함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기도를 잘못해도 나보다 나를 더 아시니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니
그 분을 향해 내 시선을 돌리면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한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상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는 것.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읽다 멈춘 책이 있고, 괜히 오래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 있다. 사람 없이도 뭔가와 연결되어 있으니 혼자인 시간이 그렇게 텅 비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엔 잘 못 듣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는, 나름 괜찮은 시간이다.
반면 혼자가 유독 힘든 사람은 머릿속 대부분을 사람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에너지의 절반 이상이 타인을 향해 있다. 그러니 사람이 사라지면 세상도 같이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거다. 남는 게 없으니까.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사람한테만 전부를 걸면 꽤 피곤해진다. 사람은 생각보다 자주 바뀌고, 떠나고, 내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까. 혼자인 시간이 그나마 편하려면 사람 말고도 좋아하는 게 몇 개쯤 있으면 된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만의 것들, 그게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려면
사랑의 본체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야 한다.
내가 스스로 욕망을 제어하며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가? 절대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나다.
나의 자유의지는 예수님을 닮아가라고 주셨고 그 분께 초점을 맞출 때 잘 살아나갈 수 있다.
돈을 어디에 쓰는지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은 체면에 돈을 쓴다. 반면 스스로 어떻게 나아질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성장에 돈을 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소비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대하는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이다.
하류의 삶은 대개 외부에서 시작된다.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고, 기분이 내키는 날에만 움직이며,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는다. 탓할 대상은 항상 바깥에 있고, 충고는 자신을 향한 공격처럼 느껴진다. 말은 많지만 행동은 늦다. 그리고 내일은 언제나 오늘보다 나은 출발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내일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상류의 삶은 반대로 내부에서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될지를 먼저 묻고, 기분과 무관하게 원칙을 따른다. 사람을 쌓아두듯 대하고, 충고를 재료 삼아 자신을 다듬는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는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한다.
이 두 방식의 차이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삶의 주도권을 어디에 두느냐. 하류는 환경이 자신을 만든다고 믿고, 상류는 자신이 환경을 만든다고 믿는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리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 쌓여 만들어지는 자리다. 오늘 어떤 질문을 먼저 하는지, 지금 이 순간 움직이는지 멈추는지, 그 작은 차이들이 결국 흐름의 방향을 가른다.
흔히 낯을 가리고 말을 아끼는 것을 사회성 부족이라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진짜 사회성 부족은 서툰 침묵이 아니라 '무례한 달변'에서 드러난다.
진짜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은 상대의 기분보다 자신의 배설적 대화를 우선시한다. 분위기를 읽지 못해 선을 넘나들면서도, 그것이 솔직함인 양 당당하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갈등의 원인을 늘 타인에게서 찾으며 자신은 무결하다고 믿는 '자기 객관화의 부재'다.
결국 사회성이란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던진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가늠하는 분별력이며, 자신의 허물을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함의 다른 이름이다.
스스로 "난 가식 없고 솔직한 성격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솔직함'과 '무례함'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상대방 기분 생각 안 하고 필터링 없이 뱉어내는 건, 솔직한 게 아니라 그냥 사회성이 떨어지고 예의가 없는 거임.
진짜 건강하게 솔직한 사람은 사실을 말하더라도 상대가 다치지 않게 단어를 고르고 예의를 지킴. 근데 자칭 솔직좌들은 남한테 상처 줘놓고 "내가 거짓말은 못 해서~", "사실은 사실이잖아~"라며 자기 합리화하기 바쁨.
배려가 빠진 솔직함은 그냥 폭력일 뿐임. 자기 성격 솔직하다는 걸 핑계로 남에게 무례하게 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음.
'관심'과 '오지랖'의 한 끗 차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고 행동을 더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방향성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따뜻한 관심이 되기도 하고 불쾌한 오지랖이 되기도 한다. 이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결국 시선의 중심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달려 있다.
진정한 의미의 관심은 그 초점이 철저히 상대방에게 가 있다. 상대를 나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관심의 시작이다.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 그렇기에 관심은 상대가 원하는 방식대로 표현된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형태를 고민하는 배려가 담긴다.
반면 오지랖은 그 시선의 중심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다. 겉으로는 상대를 위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정의 내린다. 상대의 상황이나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 혹은 자신이 편하다고 느끼는 방식대로 행동을 강요할 뿐이다. 오지랖의 이면에는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보다, 조언이나 개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거나 스스로의 마음이 편해지고자 하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관심은 상대를 존중하며 그 세계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문이지만, 오지랖은 상대의 경계를 무시하고 무단으로 침입하는 행위와 같다.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이 도리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늘 질문해야 한다. 지금 나의 행동이 상대를 위한 진심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참견인지를 말이다. 진정한 유대감은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곁을 지켜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선의의 한계와 관계의 유효기간
평소 화를 잘 내지 않고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선함을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순한 사람의 침묵은 무지함이 아니라 인내의 결과이며, 그들의 웃음은 상황을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다. 그들이 마침내 등을 돌리고 차가운 태도로 변했을 때, 우리는 그 변화를 두고 '사람이 변했다'거나 '매정하다'며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 변화는 그 사람의 본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주변의 무례함이 개인이 감내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었다는 경고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선의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그 선의가 바닥날 수 있는 유한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무례함을 견뎌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보다,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그들의 경계를 침범한다. 선함이 만만함으로 치부되고 배려가 의무가 되는 순간, 관계의 균형은 무너진다. 상대가 등을 돌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의를 낭비하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무언의 신호를 묵살했는지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리고 그 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 쌓이는 존중의 여부다. 타인의 선함을 함부로 다뤄도 되는 권리증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 관계의 생명력은 이미 다한 것이다. 한 사람이 차갑게 돌아섰다면 그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며 타인의 무례를 받아낼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선의가 마르기 전에 그 가치를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회개로의 부르심(눅 13:1-9)
1.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회개로의 부르심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 은혜롭고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에게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장에라도 우리를 “찍어버릴”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살려두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실체가 없는 위협을 일삼는 우리네 인생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편 50:21, NKRV).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열매를 찾으십니다. 열매는 진정한 믿음의 회개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로부터 영적 성장, 순종, 그리고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NKRV)
언제입니까? 회개와 열매를 맺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삶의 비극과 불확실함을 마주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가?”
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인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노래하는 이사야의 비유(사 5:1-7)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과 인내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 당에서 사역하신 3 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하나님은 약 사십 년 동안 더 기다리셨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복음의 강력한 증거를 이스라엘에게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회개와 믿음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음 메시지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AD 70 년에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인내는 너무도 크지만, 그분의 오래참으심에도 그 끝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무”는 결국 찍혀 버렸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사야 5:1, 2, NKRV).
3. 열린 결말과 개인적인 적용
이 비유는 의도적으로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린’ 결말이란 이 비유를 읽는 혹은 듣는 자가 자기 자신으로 직접 그 결론을 채워 넣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무나 결국 열매를 맺었겠습까? 특별한 하나님의 돌봄이 효력을 발휘한 것으로 드러날까요? 과연 이 나무난 살려졌을까요? 아니면 찍혀 버려졌을까요?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나무의 결말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라는 나무의 결말은 모를 수가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비유의 나무가 어떻게 되었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나무로 드러날 것인가?’가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에서 회개와 믿음의 열매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대체품을 찾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회개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뿐입니다. 미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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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 교회(Trinity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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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목적과 기능
1. 완고한 마음을 깨뜨림.
완고한 마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밀어내는 사람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런 자들의 마음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품은 죄를 드러내고 회개로 이끄는 것입니다.
완고한 마음은 자주 교만, 반역, 영적 소경됨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의 유치하고 어리석고 정당한 권위를 거부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일맥상통합니다. 설교의 목적은 이런 자들의 양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와 심판과 자비하심으로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브리서 4:2).
2. 깨어진 마음을 싸맴.
깨어진 마음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죄책의 무게에 짖눌리며,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을 당하는 마음입니다. 복음을 설교할 때 깨어진 마음이 치료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 용서, 자비와 능력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상한 마음은 이 복음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길르앗의 향유를 찾아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할 길이 열린 것에 감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능력을 사모하고 맛보아 압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3. 궁극적인 묘약으로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깨어진 마음을 싸매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깨뜨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복음이 깨뜨리는 것은 싸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굳은 마음은 반드시 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굳은 마음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는 본성에 속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영에 속한 일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인간 본성의 죄악됨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설교는 반드시 이 일을 수종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인간의 기발한 언변이나 수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죄를 도전하고 회개의 소망과 위로를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십자가는 죄와 모든 비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의 요구입니다. 십자가는 그 진리의 요구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과 사랑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당신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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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니티 뱁티스트 교회(Trinity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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