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끊어졌던 동해의 '대왕고래'가 갑자기 다시 헤엄치기 시작했다. 한국석유공사가 영국 BP를 파트너로 끌어들이고, 이재명 정권이 ‘에너지 안보’라는 거창한 명분을 달아 프로젝트 재가동을 승인했다는 소식이다.
이 뉴스를 접하며 헛웃음을 넘어 서늘한 분노가 인다. 윤석열 정부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더불어민주당이 어떻게 핏대를 세웠던가. 그들은 "국면 전환용 사기극", "밑빠진 독에 혈세 붓기"라며 온갖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고, 기어이 다수 의석의 폭력으로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적 탐사 사업의 숨통을 무참히 끊어놓았다.
상식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일 년 사이 동해 바다 밑의 석유 매장 확률이 기적처럼 솟구치기라도 했는가?
만약 과거엔 없었던 확고한 과학적, 경제적 근거가 새로 등장했다면 당장 국민 앞에 투명하게 밝혀라. 만약 그런 새로운 근거도 없이 슬그머니 사업을 재개하는 것이라면, 민주당은 과거 윤석열 정부의 치적을 흠집 내기 위해 국가의 중차대한 에너지 안보 사업을 인질로 잡고 몽니를 부렸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다.
"그때는 정략적으로 반대했지만, 이제 우리가 권력을 쥐었으니 다시 파보겠다"는 얄팍한 속내. 최소한의 인간적 염치가 있다면, 국가 백년대계를 진영 논리로 짓밟았던 그 파렴치한 과거에 대해 국민 앞에 석고대죄부터 하는 것이 순서다.
물론 그들에게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다. 그저 어제는 사기극이라며 난도질했던 대왕고래를 오늘은 에너지 안보라며 치켜세우는 저 기괴한 인지부조화 자체가, 그들의 정치적 밑천이 얼마나 얄팍하고 위선적인지를 폭로하는 가장 완벽한 자술서일 뿐이다. 오른쪽 주머니의 고래는 적폐이고, 왼쪽 주머니의 고래는 국익인가. 이 역겨운 내로남불 앞에서 진정으로 멸종되어야 할 것은 대왕고래가 아니라, 국가를 장난감처럼 쥐고 흔드는 낡은 정치꾼들이다.
MBC의 전체주의적 사상 통제를 비판한 내 글에, 좌파 성향의 네티즌 두 명이 찾아와 짐짓 진지하고도 단호한 훈계의 댓글을 남겼다. "역사 연구와 조롱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최근 논란이 된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마케팅과 책상 '탁'이라는 문구가 5.18 광주와 박종철 열사를 고의로 조롱하기 위해 기획된 악의적인 역사 모독이라고 100% 맹신하고 있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법치의 나라에서, 대체 무슨 근거로 타인의 내면을 그토록 확신하는가. 해당 마케터가 "네, 5.18을 조롱하려고 그 단어를 썼습니다"라고 양심선언이라도 했는가.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 고개를 숙인 것도 "국민적 오해를 살 수 있는 문구를 세심하게 필터링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경영자로서의 도의적 사과였지, 결코 역사 모독이라는 범죄를 자백한 것이 아니었다. 의도를 입증할 그 어떤 물증도 없는데, 우연히 겹친 단어 몇 개만 보고 타인의 뇌 구조를 꿰뚫어 보며 사상범으로 단죄한다. 우리는 이것을 '연구'라 부르지 않는다. 궁예의 '관심법'이자, 광기에 사로잡힌 맹신자들의 '집단 환각'이라 부른다.
나는 이 오만한 확증편향의 늪에 빠진 그들에게, 당신들의 모습이 중국의 맹목적 애국주의 청년 군단인 '소분홍(小粉紅)'과 완벽하게 똑같다고 답해 주었다. 사건의 발단부터 마녀사냥의 전개, 그리고 억지스러운 트집 잡기까지 두 사건은 소름이 돋을 만큼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한국의 좌파 진영이 신세계와 스타벅스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현미경을 들이대기 시작한 진짜 출발점은, 과거 정용진 회장이 SNS에 올렸던 '멸공(滅共)'이라는 단 두 글자와 스타벅스가 미국브랜드라는 점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멸하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의 발언이 좌파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그때부터 그는 '우파 적폐 기업인'으로 단단히 좌표가 찍혔다.
바다 건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농푸산취안(農夫山泉) 불매 사태'의 발단도 정확히 일치한다. 중국 최고 부호 쭝산산(鍾睒睒) 회장이 이끄는 1위 생수 기업 농푸산취안은, 창업자의 아들이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애국주의에 눈먼 소분홍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타깃이 정해지자 이성을 잃은 군중들은 일상의 기호와 사물에 기괴한 사상적 프레임을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소분홍들은 농푸산취안 생수병의 둥근 빨간색 뚜껑을 가리키며 "일본의 욱일기와 일장기를 상징한다"고 우겼고, 차 음료 포장지에 그려진 사찰 일러스트를 두고는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정문과 똑같다"며 핏대를 세웠다. 기업 측이 "중국 전통 사원을 모티브로 한 창작물"이라며 진땀을 빼며 해명했지만, 광기에 휩싸인 맹신자들에게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쩡한 생수를 변기에 쏟아버리고 빈 병을 짓밟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 마녀사냥의 여파로 쭝산산 회장의 개인 자산은 수조 원이 허공으로 증발했고, 기업의 주가와 매출은 반토막이 났다. 결국 견디다 못한 쭝산산 회장이 최근 공식 석상에 나서 "제발 맹목적인 온라인 폭력을 멈춰달라"며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생수병의 빨간 뚜껑을 보며 욱일기를 상상하는 중국 소분홍의 집단 정신병.
그리고 프로모션 이름인 '탱크'와 책상 '탁'이라는 단어에서 5.18과 1987년의 모독을 기어이 읽어내는 한국 좌파 진영의 서늘한 관심법. 이 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둘 다 자신들의 진영 논리에 거슬리는 대상인 '멸공'과 '미국 국적'을 징벌하기 위해, 일상의 단어와 디자인에 억지스러운 정치적 주홍글씨를 새겨 밥줄을 끊어버리는 끔찍한 파시즘적 폭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숭고한 역사를 수호하는 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착각하겠지만, 구경꾼의 이성적인 눈에 비친 그들의 실체는 그저 마오쩌둥 치하의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 바로 그 자체다. 민주화의 성역을 핑계 삼아 일상의 단어마저 사냥하는 이들 덕분에, 한때 역동적이던 대한민국의 지성계는 가장 참혹하고 미개한 형태의 '중국화'를 향해 맹렬히 퇴행하고 있다. 조롱을 넘어선 혐오, 연구를 가장한 광기. 당신들의 그 단호한 댓글이 증명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 당신들 내면에 똬리를 튼 그 끔찍한 전체주의적 통제욕일 뿐이다.
기표소 밖으로 투표지를 덜렁 들고 기어 나온 이재명의 기행은 누가 봐도 명백한 공직선거법 위반이자 가차 없는 무효표 처리 대상이다. 심지어 밖으로 노출된 그 투표지는 기자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혀 만천하에 공개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 선거를 지탱하는 가장 절대적인 근간인 '비밀투표의 원칙'이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완벽하게 박살 난 순간이다.
선관위는 차라리 대국민 사과를 하며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자 무효표가 맞다. 다만 현장에서 돌발 행동을 전혀 예측하지 못해 요원들이 얼어붙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고 뼈아픈 고백이라도 했어야 마땅하다. 국가 기관이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는 그 수치스러운 고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도, 국민들이 그 변명을 이해해 줄까 말까 한 참담한 사안이다.
그런데 그 알량한 솔직함마저 내다 버렸다.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비굴하게 설설 기며, 기어이 그의 헌법 유린 행위에 면죄부를 쥐여주는 방패막이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정확히 같은 사안으로 작년에 체포된 국민이 있는데 뭐라 핑계를 댈텐가?
선관위가 동네 친목회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국민적 신뢰를 스스로 쌈 싸 먹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벌거벗은 권력자를 향해 벌거벗었다고 말할 용기마저 완벽히 거세해버린 채, 기꺼이 살아있는 권력의 애완견이 되기를 택한 저 지독한 굴종 때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돌던 얄팍한 밈 하나가 있었다. 이른바 '나만 빼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의 허물 앞에서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이재명의 지독한 이중성을 조롱하던 네티즌들의 뼈 있는 농담이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권력자의 내로남불을 비꼬는 시니컬한 유머쯤으로 소비했다. 그러나 어제 공개된 짧은 투표소 영상은, 그 우스갯소리가 농담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서늘한 진심이자 통치 철학이었음을 끔찍하게 증명해 냈다.
민주당은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이냐며 무시하려들지만 이게 과연 그들 말대로 별 거 아닐까?
문제의 대화는 단 두 마디였다. 기표소 밖으로 투표지를 들고나온 이재명을 향해 선관위 직원이 다급히 제지했다.
"보여주시면 안 되고요."
법과 원칙이 작동하는 공화국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국가 기관의 통제였다. 그러나 그 금계 앞을 가로막은 직원을 향해, 이재명은 손짓하며 툭 내뱉었다.
"아 걱정말고... 난 상관없으니까."
이 짧은 대화는 단순히 무례한 해프닝이 아니다. 민주 공화국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해버린 초법적 권력자의 서늘한 자백이다.
"이리 와봐"라는 호명부터 불길하다. 어떤 국민도 투표사무원을 저렇게 손짓으로 오라가라 하지 않는다. 국가의 선거를 관리하는 헌법 기관조차 자신의 심부름을 처리하는 사적 하수인으로 여기는 뼛속 깊은 특권 의식이 그 짧은 네 글자에 농축되어 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난 상관없으니까"라는 덧붙임이다. 이 일곱 글자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수준을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 제정 이전의 중세 암흑기로 전락시켜 버린 끔찍한 퇴행의 선언이다.
인류는 피 흘리는 투쟁의 역사 끝에 마그나카르타를 탄생시켰고,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왕조차도 법 아래에 있다'는 거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것이 근대 법치주의와 공화국을 지탱하는 뼈대다. 공화국 체제에서 법의 통제에 '상관없는' 예외적인 인간은 단 한 명도 존재할 수 없다. 룰을 초월하여 "나는 상관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역사상 오직 절대군주뿐이었다.
그런데 이재명은 대낮의 투표소에서 천연덕스럽게 선언했다. 공직선거법이 무엇을 징벌하든 나 이재명은 예외라는 거대한 오만. 내가 곧 법인데, 감히 종잇조각에 적힌 낡은 규정 따위가 내 행동을 제약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네티즌들이 비웃던 '나만 빼고'라는 그 조롱 섞인 밈이, 800년의 인류 법치사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가짜 군주의 입을 통해 완벽한 실화로 완성된 순간이다.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서, 스스로를 근대를 거슬러 중세의 왕이라 확신하는 기괴한 권력자의 행차를 목도했다. 법은 타인을 탄압할 때 들이미는 흉기일 뿐,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저 지독한 예외주의.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도 이토록 천연덕스럽게 공화국의 근간을 뭉개는 자가, 밀실에서 권력의 칼자루를 온전히 쥐었을 때 이 나라의 법치와 시민의 일상을 어떻게 유린할 것인가.
마그나카르타 이전의 야만 시대로 회귀한 절대군주의 귀환. 투표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난 상관없으니까"라는 저 서늘한 한마디 앞에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공화정은 지금 참담하게 능멸당하고 있다.
기표소의 커튼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엄격하고 서늘한 결계다. 한 번 기표 용구를 손에 쥐고 그 결계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들고 있는 투표지는 더 이상 신성한 한 표가 아니라 '공직선거법 위반'의 명백한 증거물이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가 사전투표 첫날 벌인 기괴한 촌극을 보라. 이재명은 기표소 안에서 도장을 찍다 말고 투표용지를 버젓이 들고 밖으로 기어 나와, "도장이 반만 찍혔는데 무효표가 아니냐"며 선관위 직원에게 흔들어 댔다. 그리고는 버젓이 다시 기표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것은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다. 투표지를 들고 기표소를 들락거리는 행위는 '비밀투표 원칙 침해'는 물론, 투표지 훼손이나 인증샷 촬영 등 부정선거로 직결될 수 있는 치명적 위법 행위다. 만약 평범한 일반 국민이 이런 짓을 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당장 현장 요원들이 달려들어 투표용지 노출을 이유로 가차 없이 무효표 처리를 하고, 선거소란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현행범으로 경찰에 인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불법의 현장 앞에서 대한민국 선관위의 대응은 눈물겹도록 '서윗(Sweet)'했다. 투표지가 노출되든 기표소를 다시 들어가든, 그저 권력자의 심기가 상할까 굽신거리며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고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특급 의전. 이쯤 되면 국가의 선거를 엄정하게 관리해야 할 선관위가 아니라, 권력자의 범죄를 눈감아주는 완벽한 '찢관위'이자 이재명 개인의 선거 도우미로 전락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서늘한 블랙코미디에서 가장 실소가 터지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이재명 본인의 지독한 '선거법 위반 DNA'다.
그는 과거 숱한 선거법 위반 재판으로 정치적 사선을 넘나들며 법정을 제집 드나들듯 했던 인물이다. 지지자들은 그가 기어이 대통령 완장을 찼으니, 이제 평생 선거법 위반으로 법정에 설 일은 없을 것이라며 안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능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다. 대통령이 되어서 치르는 첫 투표 현장에서조차, 보란 듯이 기표소 밖으로 투표지를 들고나와 공직선거법을 천연덕스럽게 짓밟아버리는 저 경이로운 습관성 헛발질을 보라.
평생을 편법과 위법 속에서 살아온 그 '법치 경시의 DNA'만큼은 권력으로도 절대 세탁할 수 없음을 그가 스스로 증명해 주었다. 참으로 투명하고도 완벽한 엑스맨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처럼 ‘암표상이 질서와 공정을 말하는 듯한’ 이 역겨운 언어희롱과 기이한 연설 태도는... 오늘도 풀린 신발끈을 조여 매게 한다.
재판 받지 않는 걸 넘어, 자기 재판 자기가 없애겠다는 것보다 더 큰 특권이 있나? 그 미친 짓을 기어이 하겠다는 민주당보다 더 비대한 짐승같은 기득권이 대한민국에 또 어디 있냐는 말이다.
#이재명_연설하네
"매일 출근하는 게 공포고, 포스기 앞에 서는 게 지옥 같다."
스타벅스의 한 매장 직원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린 절규다. '탱크 텀블러' 마케팅이 터진 이후, 매장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커피를 내리는 현장 노동자들은 졸지에 '역사적 대역죄인'의 공범으로 전락했다.
매장을 찾아온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들은 유니폼을 입고 반격할 수 없는 직원들을 향해 "너희도 똑같은 놈들"이라며 폭언을 퍼붓고, 텀블러를 환불하며 매서운 사상 검증을 강요하고 있다. 거룩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겠다는 투사들이, 최저시급을 받으며 하루하루 묵묵히 생업을 이어가는 2030 청년 노동자들의 멱살을 쥐고 화풀이를 해대는 기괴한 호러물이 전국 곳곳에서 상영 중이다.
이 끔찍한 촌극은 좌파 진영이 입에 달고 사는 '노동 존중'과 '약자 연대'라는 수사학이 얼마나 역겨운 위선인지 가장 투명하게 폭로한다.
그들의 분노는 절대 강자를 향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진영 내부에서 벌어지는 진짜 역사 모독 앞에서는 그토록 한없이 관대하고 평온하던 자들이다. 정원오 같은 정치인이 추악한 주폭(酒暴) 사건을 일으키고도 5·18 의견차라는 말 같잖은 핑계 뒤에 비겁하게 숨었을 때, 혹은 그들만의 성역인 5·18 전야제가 숱한 정치적 논란으로 얼룩졌을 때, 이 위대한 투사들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권력을 쥔 '우리 편'의 진짜 악행 앞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흐린 눈을 뜨고 침묵했다.
그러나 본사의 행사 기획안 따위는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그저 매뉴얼대로 프라푸치노를 갈고 샷을 내리는 힘없는 말단 직원 앞에서는 잔인한 사냥개로 표변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권력을 쥔 정치인에게 덤비는 것은 위험하고 피곤하지만, 서비스업의 굴레에 묶여 무조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알바생과 직원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것은 가장 안전하고 값싸게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강자에게는 비굴하게 침묵하고, 저항할 수 없는 약자에게만 핏대를 세우며 사상 검증의 채찍을 휘두르는 짓. 이것이 바로 좌파가 그토록 자랑하는 정의의 쪼잔하고 비루한 홍위병 그 자체의 민낯이다.
세상 어느 민주화 운동이, 어느 인권 투쟁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동료 시민의 밥줄을 인질로 잡고 공포를 강요한단 말인가. 텀블러 이름 하나에 발작하며 바리스타들에게 침을 뱉는 그 얄팍한 광기 앞에서, 진정한 파시즘의 냄새를 맡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 신화의 바다 요정 '사이렌(Siren)'은 글로벌 커피 기업 스타벅스를 상징하는 로고다. 그들이 1년 365일 전 세계 매장에서 일상적으로 굴리는 평범한 마케팅 기호일 뿐이다. 그런데 이 흔해 빠진 커피 마케팅이 이재명과 조국의 기괴한 렌즈를 통과하자, 순식간에 국가적 대역죄로 둔갑했다. 하필 4월 16일에 '사이렌 이벤트'를 연 것이 세월호 참사를 비하하고 조롱하기 위한 악의적 도발이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억지 음모론이 갑자기 튀어나온 배경을 건조하게 해부해 보자. 그 이면에는 꽤나 찌질하고 궁색한 좌파 진영의 초조함이 도사리고 있다.
앞서 그들이 야심 차게 쏘아 올렸던 '탱크 텀블러=5·18 조롱' 선동이 대중의 철저한 외면 속에 처참하게 폭망했기 때문이다. 만만한 동네 매장 알바생의 멱살이나 쥐고 사상 검증을 해대는 이 쪼잔한 마녀사냥에 상식적인 시민들이 동조할 리 만무했다. 다급해진 기획자들은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기업의 과거 마케팅 캘린더까지 이 잡듯 뒤졌고, 기어이 '사이렌'이라는 단어 하나를 끄집어내 '세월호'라는 가장 자극적인 성역의 트라우마와 억지로 엮어버린 것이다.
불매와 선동의 땔감이 떨어지자, 이제는 커피잔에 새겨진 인어 그림에서 세월호의 비극을 연상해내며 분노를 쥐어짜 내는 이 처절한 상상력. 이쯤 되면 정치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집단적 병증을 의심해야 할 판이다. 커피 판촉 행사에서 악마의 계시를 읽어내며 핏대를 세우는 저 광기 앞에서는,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꾼들이나 부적을 태우는 사이비 무당들조차 한 수 접고 물러날 지경이다.
상식을 가진 정상인들이 이 억지 선동 앞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대화의 벽에 부딪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논리와 팩트의 세계에 사는 이성적인 시민이, 마케팅 로고 하나에 억지 의미를 부여하며 발작하는 정신적 맹신도들을 도대체 무슨 수로 설득하겠는가.
병적인 피해망상과 억지 트라우마를 정치적 땔감으로 태우는 자들에게 이성은 통하지 않는다. 대화로 설득하려 애쓸 필요 없다. 저들의 선동은 차가운 투표와 철저한 무관심으로 고립시켜 박멸해야 할 정치적 질병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탱크 선동이 실패하자 사이렌 무속 신앙까지 끌어들이는 좌파 진영의 가장 처참하고 미개한 밑바닥을 목도하고 있다.
국가의 뼈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경기도 수원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태극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제지를 당하는 기괴한 풍경. 국민의 혈세 3억 원을 집어삼킨 시민단체 응원단이 적국의 득점에 환호하고 자국 국가대표의 실축에 열광하는 끔찍한 자해극. "대한민국에서 인공기를 들어야 하느냐"는 탈북민의 서늘한 절규는, 이 나라가 지금 어디를 향해 추락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지표다.
그러나 이 참담한 주권 유린의 현장보다 우리를 더욱 경악게 하는 것은, 사건이 알려진 직후 벌어진 좌파 진영의 집단적 야만성이다. 태극기를 왜 못들게하냐 외쳤던 탈북민 유튜버 김서아의 채널에는 좌파들의 원색적인 악플이 보인다. 그들이 뱉어내는 린치의 핵심은 단 하나다.
"북으로 돌아가라."
이 지독한 폭력성을 건조하게 해부해 보자. 압제와 굶주림을 피해 사선을 넘어온 생존자에게, 다시 그 처혹한 공개처형과 정치범 수용소의 지옥으로 돌아가라고 저주를 퍼붓는 짓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대한민국 땅에서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들어 북한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인권'을 부르짖고 '소수자와 약자 보호'를 독점하려 들던 그 거룩한 깨시민들의 민낯이, 적국의 깃발 앞에서는 이토록 잔인한 파시스트의 얼굴로 돌변한다.
텀블러 따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 거대한 국가적 모욕 앞에서도 절대 분노하지 않는 자들. 오히려 태극기를 든 약자를 짓밟으며 "북으로 가라"고 침을 뱉는 자들. 이것은 단순한 이중잣대가 아니다. 이재명과 그를 호위하는 종북 세력의 세계관이 뼛속까지 사대적이고 반(反)국가적이라는 끔찍한 자백이다.
이제 묻고 싶다. 텀블러 하나에 국가 권력을 총동원하려 들면서 정작 국가의 자존심과 안보는 적국에 상납하고, 헌법이 품은 우리 국민인 탈북민을 핍박하는 이 기괴한 집단에게, 우리는 언제까지 이 나라의 운명과 5천만의 생존을 맡겨둘 것인가.
제발, 이제는 국민이 정신을 차려야 할 시간이다. 얄팍한 선동과 가짜 평화라는 환각제에 취해 국가 시스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브레이크는 결국 주권자의 차가운 각성뿐이다. 이 미쳐 돌아가는 코미디를 두 눈 똑바로 뜨고 응시하라. 다가오는 선거에서 투표지라는 이름의 단호한 심판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태극기를 숨긴 채 인권의 유린을 방관하며 살아가야 하는 진짜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법은 한 사회가 합의한 최소한의 규칙이며,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의 의사봉은 그 합의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묵직한 공적 도구다. 그러나 최근 그 헌법적 상징은 서영교의 입을 통해 철저히 모욕당하고 사유화되었다.
"내가 망치를 안 두들기면 법은 통과 안 된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라, 내가 법 통과시켜주겠다."
대한민국의 입법 권한을 동네 계모임의 쌈짓돈이나 백지수표처럼 지인에게 던져준 이 참담한 선언을 두고, 좌파 진영은 "선거 유세장의 흔한 관행"이라며 두꺼운 방어막을 친다. 국가의 법률 제정권을 뇌물처럼 뿌려대는 이 끔찍한 권력 사유화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들의 기괴한 뇌구조 앞에, 아주 건조하고 단순한 상상력 테스트를 하나 제안한다.
양심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라. 만약 21대 국회에서 국민의힘 소속이었던 김도읍 법사위원장이 선거 유세장에 나와 똑같은 워딩으로 "내가 망치를 안 치면 법은 없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라고 떠들었다면, 도대체 이 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결과는 보지 않아도 명징하다. 민주당과 좌파 시민단체들은 당장 "민주주의의 압살", "의회 독재의 쿠데타", "공권력의 사유화"라며 게거품을 물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김도읍의 즉각적인 사퇴와 정계 은퇴를 촉구하는 촛불이 타오르고, 언론노조가 장악한 방송사들은 연일 긴급 특보를 편성해 보수 정권의 파시즘적 오만함을 사생결단으로 물어뜯었을 게 뻔하다.
오른쪽에서 벌어지면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대역죄가 되고, 왼쪽에서 벌어지면 유쾌한 선거용 덕담으로 둔갑하는 이 지독하고 역겨운 이중잣대.
이들은 입버릇처럼 민주주의와 시스템을 말하지만, 실상은 완장을 찬 자의 기분과 진영의 이익이 국가 시스템을 짓누르는 전체주의적 통제 방식을 완벽하게 체화하고 있다. 서영교의 '망치 독재' 선언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적 장치를 부숴버리고, 법마저 진영의 전리품으로 전락시킨 좌파 카르텔의 섬뜩한 민낯이자 자백이다.
동업자를 위해 무심하고 오만하게 내리치는 그 가벼운 망치 소리 아래서, 지금 대한민국의 법치와 상식은 뼈대부터 서늘하게 부서져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