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를 무시하는 거예요."
(이성복, 무한화서 中)
난 오랫동안 앞의 '실패'와 뒤의 '무시'를 혼동하였다. 그 흔적들을 굳이 X에 전시하려는 것은 왜때문일까?
"사상가와 달리, 작가는 언어의 추동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언어의 그물이 먼저 던져지고, 그걸 끌어당기는 게 작가의 역할이에요.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어떤 사상에도 기댈 필요가 없어요."
(이성복, 무한화서 中)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구절. 자유로운 동시에 비장해진다.
사회초년생때 썼던 노트를 뒤적거리다 이런 걸 발견했다. 좋은 회사인데 왜 사서 고생하냐는 만류를 뿌리치고 지금은 퇴사 후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현재에도 아래 내용은 아마도 그때보다 훨씬 더 잘 적용이 된다.
삶의 굴레는 옥죄이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내 태도에 달렸다고 본다. 까뮈식으로 말하면 세상의 부조리함은 그에 대한 저항을 의미있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니까.
샤프를 잡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고, 계절은 더 사나워졌고, 꼬인 문제들, 잡다한 고민들은 더 복잡해졌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전진보다는 퇴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든, 별 대수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엇에 관해서건 이제 쉽게 잊어버린다.
-권태3 中-
1. 아침 6시 26분. 수국차의 여운을 남기는 듯한 단맛이 나는 좋다. 이건 분명 중독성이 있다. 나는 단맛을 곱씹으며 우리의 짧았던, 그러나 아직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러나 결국에는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말, 사랑을 생각한다.
수국차 한잔. 우리의 사랑. 입안에 맴도는 단맛. 단맛이 일으키는 환상. 나는 맛좋은 담배를 빨고 있는 것만 같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대체 어떤 사고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 채, 난파선의 갑판 아래서 태어난 사생아처럼 우리는 떠다니고 있었다.
산파는, 너울거리는 죽음의 파도만을 채 떠지지도 않은 눈 앞에 끌어다 놓고는 실종된 지 오래였고, 오직 핏빛으로 황홀하게 임종하는 태양만이 작열하며, 접신한 무당이 그럴 때처럼 제 하루의 마지막 발작을, 구경꾼들의 눈동자에 세찬 떨림과 함께 반사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살풀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