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이 꽤 불편한 말을 했다.
아이들이 구구단을 잊고,
긴 나눗셈이나 제곱근 계산을 못하게 되어도
“그게 정말 중요한가?”
라는 것이다.
처음 들으면
“이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인터뷰 전체를 보면
젠슨 황이 말하는 핵심은 조금 다르다.
그는 자신의 세대 엔지니어들은
트랜지스터 하나하나를 깊게 이해했지만,
지금의 엔지니어들은
그보다 훨씬 거대한 시스템을 다룬다고 말했다.
낮은 단계의 능력 일부는 사라졌지만
대신 인간이 더 높은 단계에서
시스템 전체를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계산기가 생겼다고
수학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이 생겼다고
목적지를 정하는 능력이
필요 없어지지도 않았다.
AI도 비슷한 변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중요한 건
내가 AI보다 코드를 빨리 짜는가,
자료를 빨리 찾는가,
문장을 빨리 쓰는가
같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AI에게 무엇을 시킬지 결정하고,
결과가 맞는지 판단하고,
여러 작업을 연결하고,
전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젠슨 황도 앞으로 학생들이
AI를 사용하고 Agent와 협업하는 법을 모르고
졸업하는 일은 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직장인들은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공부의 방향을 조금 바꿔야 한다.
첫 번째는
내가 하는 일을 더 깊게 이해하는 것.
회사에서 돈이 어떻게 벌리는지,
고객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업무의 앞뒤에는
어떤 일이 연결되어 있는지.
AI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판단하려면
그 분야를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AI에게 일을 맡기는 능력.
단순히 질문 몇 개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일을 쪼개고,
필요한 자료를 주고,
결과를 검사하고,
틀리면 다시 수정시키고,
반복되는 일은
다음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시스템으로 생각하는 능력.
문제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이걸 바꾸면 어디에 영향이 가는지,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
어디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를 보는 힘이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도
AI·기술 활용 능력과 함께
분석적 사고, 시스템 사고, 창의적 사고,
지속적으로 배우는 능력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증하는 능력.
AI가 답을 만들어주는 시대에는
답을 만드는 사람보다
“이 답이 맞는가?”
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부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강의를 열 개 듣는 것보다
오늘 내 업무 하나를 골라
AI와 같이 해보고,
왜 이런 답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틀린 부분을 직��� 찾아보고,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도록
내 방식으로 남겨두는 것.
이걸 반복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공부가 될 수 있다.
20대라면
기본기를 쌓으면서 AI를 최대한 많이 써보고,
30대라면
그동안 쌓은 실무 경험과 AI를 연결하고,
40대라면
경험에서 나온 판단력을 이용해
사람과 AI가 일하는 구조 자체를
설계할 수 있다.
나이가 많다고 반드시 불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AI가 실행을 대신해줄수록
오랫동안 일을 하며 쌓은 경험과 판단력이
더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다.
Microsoft도 앞으로 직장인이
AI Agent에게 일을 위임하고 관리하며
업무 프로세스를 다시 설계하는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요즘
“무슨 공부를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전부 배워야 한다고
조급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대신 세 가지를 계속 물어보면 된다.
나는 내 일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AI를 이용하면
이 일을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가?
AI가 만든 결과가 맞는���
나는 판단할 수 있는가?
AI 시대의 공부는
모든 것을 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맡겨도 되고,
무엇은 내가 판단해야 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AI 때문에 공부가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가 바뀌고 있다.
[ 같은 말인데도 호감도 확 올려주는 말투 ]
1. 늦었을 때
❌ 늦어서 죄송합니다
⭕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 다시 물어볼 때
❌ 죄송한데 다시 여쭤봐도 될까요?
⭕ 정확히 하고 싶어서 한 번만 더 확인할게요
3. 부탁할 때
❌ 바쁘신데 죄송해요, 이것 좀…
⭕ 10분이면 됩니다. 목요일까지 가능하실까요?
4. 실수했을 때 (업무)
❌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제가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중으로 수정해서 드리겠습니다.
5. 거절할 때
❌ 죄송한데 제가 좀 어려울 것 같아서…
⭕ 이번 주는 어렵고, 다음 주 화요일부터는 가능합니다
6. 의견이 다를 때
❌ 죄송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 한 가지만 더 보고 싶은데, 이 경우는 어떨까요?
7. 도움받았을 때
❌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 덕분에 훨씬 빨리 끝났어요. 감사합니다
불교 명언 중에 유독 오래 남는 말이 있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때로는 놀라운 행운일 수 있음을 기억하라”
간절히 원했던 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은 그걸 실��라고 부른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못 이룬 것들이 오히려 지금을 지켜준 경우도 많다.
원하는 대로 다 됐으면 몰랐을 것들을,
안 됐기 때문에 알게 된다.
아직도 뭔가 안 풀리는 사람 있다면,
이 말 한번 곱씹어보길.
화 안 내는 사람의 사고방식
'빈 배 이론'이라는 게 있음.
내가 배를 몰고 강을 가는데, 어떤 배가 와서 내 배에 쿵 부딪침.
당연히 기분 나쁘고 화가 남.
저 운전하는 놈은 뭔데 와서 박나 싶음.
그래서 그 배에 누가 탔나 봤더니, 아무도 없음. 그냥 빈 배였음.
그 순간 화가 누그러짐.
누가 나한테 일부러 해를 가한 게 아니라, 그냥 빈 배가 떠내려와 나를 덮친 것뿐이니까.
이 이론의 핵심은 여기 있음.
평소 우리가 당하는 온갖 안 좋은 일도 이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임.
나한테 나쁘게 구는 사람들도, 어떤 면에서 보면 다 비어 있는 존재임. 자기도 모르는 욕망, 자기도 모르는 습관에 떠밀려 그러는 경우가 많음.
근본적으로 보면 빈 배나 다름없는 것들에 의해 그 일을 당하는 거임.
그러니 조금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음.
박완서
“첫 소설을 낸 것이 마흔이었다.
그 전은 아이 다섯을 키운 시간이었다.
늦게 시작한 사람은
그 전을 버린 시간이라 부른다.
정작 쓸 것은 거기서 나온다.
처음 쓰려���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전쟁통에 만난 가난한 화가를
기록해두려던 것이 전부였다.
무엇이 될지 정하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
마흔 이후 ��십 년을 그것으로 살았다.
시작하기 좋은 나이는
지나고 나서야 이름이 붙는다.”
제우스의 법을 깨뜨린 자의 귀환
―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
인간 사회의 황금률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을 말한다.
기독교의 《누가복음》 6장 31절에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인간사회를 지탱해온 황금률이었다.
이보다 앞선 고대 그리스에도 이와 유사한 질서가 있었다. 낯선 이를 집에 들여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보호하며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환대의 법칙, 즉 ‘크세니아’다. 영화 《오디세이》는 이 오래된 사회적 약속을 관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우스의 법’이라고 부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외눈박이 괴물도, 사이렌의 노래도, 거대한 파도도 아니다. 모든 고난의 출발점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고안했다는 사실이다.
��로이인들은 목마를 신에게 바치는 선물로 믿고 성안에 들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신들을 죽이러 온 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다. 오디세우스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환대와 신뢰의 법칙을 누구보다 영리하게 이해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제우스의 법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그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용하여 승리했다.
이것이 영화가 오디세우스의 지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영리함은 그 자체로 선하지 않다. 규칙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은 규칙을 지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누구보다 교묘하게 악용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후자를 선택했고 트로이전쟁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승리는 동시에 인간 사이의 신뢰를 파괴한 최초의 죄가 된다.
그 결과 오디세우스는 전쟁이 끝난 뒤��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가 항해 중 만나는 섬과 괴물, 마녀와 유혹은 단순한 모험의 장애물이 아니다. 자신이 파괴한 법칙이 사라진 세계를 직접 통과하는 형벌이다. 환대를 이용해 적을 죽인 사람은 이후 어느 땅에서도 안전한 손님이 될 수 없다. 낯선 곳에 도착할 때마다 그는 환영받을지 살해당할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왕이라는 신분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과거의 명성과 트로이에서의 승리는 새로운 섬에 도착하는 순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부하들은 그의 판단을 의심하고, 낯선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믿지 않으며, 고향에 돌아와서조차 그는 거지로 변장한 뒤 활을 당겨 자신이 진짜 오디세우스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왕조차 어제의 업적으로 오늘을 살 수 없다. 생존하려면 매 순간 능력과 자격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
호메로스의 원작 《오디세이아》가 한 인간의 모험을 통해 삶의 유혹과 고통, 귀환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은유라면, 놀란의 영화는 그 여러 의미를 ‘제우스의 법’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집중시킨다. 원작에서는 신들의 변덕, 인간의 오만, 부하들의 탐욕과 실수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방해한다. 반면 영화는 흩어진 고난을 트로이 목마라는 하나의 원인에 묶는다. 오디세우스가 겪는 고통은 우연히 닥친 불운이라기보다, 인간사회의 근본 규칙을 무너뜨린 사람이 치르는 대가에 가깝다.
이러한 재해석은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와 직접 연결된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지성을 지녔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어 전쟁의 승리에 기여한다. 그러나 ‘만들 수 있다’는 능력이 ‘만들어도 된다’는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디세우스 역시 트로이 목마를 고안할 만큼 영리했지만, 그것을 실행할 자격까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시대가 요구한 승리를 제공하고 영웅이 되지만, 승리 이후 자신이 만들어낸 파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든 뒤 자신이 시작한 연쇄반응이 세계 전체를 집어삼킬 가능성을 두려워한다면, 오디���우스는 목마를 이용해 환대의 법칙을 깨뜨린 뒤 아무도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세계를 떠돈다. 두 영화 모두 천재의 성취보다 천재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다크 나이트》와도 연결점이 있다. 조커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성공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지켜온 규칙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쉽게 붕괴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배트맨 역시 악을 막기 위해 도덕적 경계를 넘어설 때 자신이 지키려던 질서를 훼손할 위험에 빠진다. 놀란의 세계에서 규칙은 약자의 순진한 장식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살아가기 위한 문명의 기반이다. 따라서 규칙을 악용해 얻은 승리는 당장은 효율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승자 자신까지 불신과 폭력의 세계에 가둔다.
《인셉션》과의 유사성은 죄책감의 형태에서 드러난다. 코브는 아내 맬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무의식 속에 감추지만, 억압된 기억은 매번 임무를 방해하는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오디세이》에서 아테나 역시 실제 여신인지,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인���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신의 실재 여부가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트로이에서 저지른 일을 자신의 내면에서 추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놀란에게 가장 집요한 괴물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합리화되지 않은 기억이다.
동시에 《오디세이》는 《인터스텔라》를 뒤집어놓은 귀환의 영화이기도 하다. 쿠퍼에게 집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이고, 가족에 대한 사랑은 우주와 시간을 건너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 집은 그리움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장소다. 그는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의 귀환을 가로막는 것은 바다만이 아니다. 영웅이라는 외피가 벗겨진 뒤 가족 앞에 한 인간으로 서야 한다는 공포다.
이 영화의 기술적 성취를 과도하게 신성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세트와 실제 로케이션, IMAX 화면이 만들어내는 물성과 규모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 압도감의 상당 부분은 막대한 제작비와 뛰어난 기술진이 보장한 결과이기도 하다. 충분한 자본과 일정 수준 이상의 연출력을 지닌 감독이라면 외형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장관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인다. 영화의 액션이나 스펙터클만 떼어놓고 보면, 놀란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경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놀란의 진짜 연출력은 볼거리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2,700년 된 이야기에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부여한 데 있다. 수많은 모험담을 단순히 웅장하게 영상화한 것이 아니라, ‘제우스의 법을 악용한 승리’와 ‘그 법이 무너진 세계에서 치르는 고난’이라는 구조로 다시 배열했다. 덕분에 사이클롭스와 키르케, 칼립소와 사이렌은 제각기 흩어진 신화적 볼거리가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죄와 책임을 비추는 서로 다른 거울이 된다.
이 관점에서 영화의 핵심은 권선징악처럼 “규칙을 어겼으니 벌을 받았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규칙을 깨뜨린 사람에게 신이 별도의 형벌을 내릴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공동체의 신뢰를 파괴한 순간, 그는 자신도 신뢰받을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버린다. 오디세우스의 고난은 외부에서 부과된 형벌인 동시에 자신이 설계한 승리의 논리적 결과다.
결국 《오디세이》는 한 왕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영리함으로 문명의 ���칙을 무너뜨린 사람이 다시 인간사회로 돌아갈 자격을 얻는 과정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통해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길을 잃는다. 그의 진정한 귀환은 이타카 땅을 밟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가 낳은 죽음과 부하들의 희생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시작된다.
스펙터클은 이 영화를 거대하게 보이게 하지만, 제우스의 법에 대한 재해석은 이 영화를 다르게 만든다. 놀란은 고대의 모험담을 현대적인 책임의 문제로 바꾼다. 사회의 규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천재가 그 규칙을 악용해 승리했을 때, 그는 과연 승리자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파괴한 질서 속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오디세이》가 원작과 갈라지는 지점이며, 동시에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일 잘하는 사람이 떠나는 이유
일 잘하는 사람이 퇴사를 고민한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늘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고, 아무도 맡고 싶��� 않은 일도 먼저 나서는 사람들이다.
주변에서는 어디 가도 잘할 사람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사람일수록 조용히 회사를 떠난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잘해서 맡게 된 일이 어느 순간 당연한 몫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잘하는 사람���게 기회가 오는 게 아니라,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계속 쌓일 뿐이다.
문제가 생기면 찾는 사람, 급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신뢰는 부담으로 바뀐다.
사람은 일이 많아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이 사라질 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질 때 떠난다.
조직은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그 자리의 무게를 깨닫는다.
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익숙해졌을 뿐이다.
좋은 리더는 일을 더 맡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 능력이 더 큰 가치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조직이 가장 지켜야 할 사람은 가장 크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
자식을 키우는 동안은 그 아이들이 삶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 생각, 밤에 눈을 감을 때도 아이 걱정이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다 보면, 어느 순간 곁에 있던 배우자는 풍경처럼 익숙해져 버린다.
그러다 아이들이 하나둘 집을 떠난다. 대학, 취업, 결혼. 당연한 수순이지만 막상 그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다. 북적이던 식탁이 조용해지고, 현관에 쌓이던 운동화가 사라진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사람. 수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그 얼굴.
인생의 후반부는 결국 둘이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자기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맞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부모에게 남겨진 시간은 �� 길다. 그 긴 시간을 함께 견뎌줄 사람은 배우자뿐이다.
그러니 지금 잘해야 한다. 나중에 잘하면 되겠지, 아이들 다 크면 여행도 가고 그러자는 말은 자꾸 미루다 보면 영영 못 하게 되는 약속이다. 습관이 된 무관심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오늘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배려 하나가 나중의 그 긴 시간을 결정한다.
자식은 내가 키운 사람이지만, 배우자는 내 삶을 함께 선택한 사람이다. 그 선택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한강 작가, 문학을 읽는 것의 의미
“책을 읽는 것, 특히 문학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게 해줍니다.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이나 영혼에 다가가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독서는 큰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고,
내가 5년 동안 매일 외운 문구.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에밀 쿠에의 <자기 암시>에 나오는 문구다
인간의 무의식을 활용해
문구를 반복하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 삶을 이끄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