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까지 관여된 조직적 증거인멸, 경찰청장 대행 당장 물러나야]
강간살인죄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다.
한 사람, 아니 한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극악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이유로 광산경찰서장이 직접 나서 강간살인죄 적용을 막고, 증거를 조직적으로 인멸하고, 살인마의 아버지에게는 증거인멸 기회를 제공했다.
단순 살인죄가 적용되면 기껏해야 징역 십수 년 선고가 되고, 살인마 장윤기는 30대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된다.
현직 경찰관들이 살인마 편을 드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다.
범행의 계획성, 잔혹성에 비춰 반드시 여죄가 있을 것인데, 이미 상당한 증거가 소실됐다.
꼬리 자를 일 아니다. 경찰청장 대행은 자리보전하느라 눈치 보지 말고 당장 물러나라.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수사권 뺏고 ‘관심법’으로 폭로하라는 기적의 사법 개혁
과거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내고 이른바 '검찰 개혁'의 선봉에 섰던 최강욱이, 최근 유튜브 방송 '매불쇼'에 나와 사법 역사에 길이 남을 기상천외한 궤변을 투척했다. 경찰이 부실 수사로 사건을 덮으려 할 때 검찰의 보완 수사권마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했다. "내가 검사라면 언론에 알린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경찰이 뭉개고 넘어갈 수 없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찬란한 무지성이다.
이 발언이 품고 있는 첫 번째 블랙코미디는 좌파 진영의 찬란한 내로남불이다. 지난 수년간 그들이 국가의 가장 거대한 악폐습이자 원죄로 규정하며 거품을 물었던 단어가 무엇이던가. 바로 '검언유착(檢言癒着)'이다. 검사가 언론에 정보를 흘려 여론을 선동한다며 온 나라를 마녀사냥의 굿판으로 몰아넣었던 자들이, 이제는 "검사가 언론에 찌르면 해결된다"며 그토록 저주하던 검언유착을 아예 스스로 망가뜨린 사법 시스템의 공식 해결책으로 뻔뻔하게 권장하고 나섰다. 남이 하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공작이고, 내 제도의 구멍을 메울 때 쓰면 정의로운 내부 고발이 되는 참으로 알뜰한 잣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끔찍하고 치명적인 모순은 이들의 얄팍한 법률적 상상력 그 자체에 있다. 헌법 개정이 불가능한 상황에 법률만 뜯어고쳐 이름만 남은 검찰은 오직 '공소(기소)만을 제기하는 비수사 기관'으로 전락이 예정되어 있다.
자, 여기서 최강욱의 해맑은 뇌피셜을 차갑게 해체해 보자. 검찰의 수사권이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도대체 검사가 경찰의 수사가 조작되었거나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지한단 말인가?
지금이야 '보완 수사권'이라는 합법적 권한이 있으니, 송치된 서류의 모순을 뒤집어보고 증거를 재확인하며 경찰 수사의 맹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광주 여고생 살인 사건에서 수사팀장의 증거 인멸을 잡아낸 것도 바로 이 보완 수사 덕분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수사를 할 수 없게 검사의 눈과 귀를 다 뽑아버려 놓고선, 대체 무슨 수로 경찰의 짬짜미를 눈치채라는 것인가? 궁예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심법'이라도 쓰라는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수사권이 거세된 검사가 서류 더미에서 풍기는 '쎄한 느낌'만으로 기우제 지내듯 언론에 제보를 했다고 치자. 구체적인 물증을 수집할 권한도, 정확한 수사 상황을 파악할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불쑥 마이크를 잡으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까.
당연히 경찰은 "명백한 가짜뉴스이자 명예훼손"이라며 해당 검사와 기자를 즉각 고발할 것이다. 당장 좌파들이 며칠 전 통과시킨 입틀막법이 시퍼렇게 살아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허위 조작 정보에 최대 5배의 징벌적 배상을 때리겠다는 그 무시무시한 법망 앞에서, 구체적 물증 없이 폭로에 나섰다가 가짜뉴스로 몰린 검사와 기자가 수억 원의 징벌적 철퇴를 맞게 되면 최강욱 당신이 그 벌금을 대신 내줄 텐가?
제도적 견제 장치를 다 부숴버리고, 그 자리를 근거 없는 언론 플레이와 떼법으로 채우려는 걸 조언이랍시고 뻔뻔하게 내뱉는 걸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법이 약자와 서민이 아닌 강자와 권력자를 지켜려는 사회는 결코 문명국가가 아니다. 수사 권한은 뺏어놓고 뇌피셜로 폭로전을 하라며 무책임하게 등 떠미는 그야말로 '왜 때문인지 율사'의 궤변. 이토록 천박한 상상력이 사법 개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돌아다니는 것도 참담하지만, 자기들도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시행되게 방치한다면 공범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무너져가는 사법 시스템의 잔해 속에서 억울하게 피 흘리며 쓰러질 희생양은 폭증할 수 밖에 없다.
루마니아 정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재명이 야심 차게 던졌다는 농담 한마디에 온 국민의 얼굴이 화끈거려야 했다.
"드라큘라 있는지 체험하러 가봐야겠다."
동네 호프집 취객의 농담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대표하는 외교 무대에서 튀어나온 발언이다. 쉰새 진동하는 이 1980년대 B급 영화 수준의 개그를 두고, 어느 기자는 기어코 "회심의 농담"이라는 찬란한 타이틀까지 붙여주며 아부를 떨었다. 기사를 쓰며 자판을 두드리는 기자의 손가락조차 부끄러움에 오그라들지 않았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저따위 망발을 훌륭한 유머 감각으로 윤색해 주어야만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권력의 나팔수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다.
외교 무대에서 유머는 지성의 척도이자 상대국에 대한 문화적 존중의 결정체다.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드라큘라'가 어떤 의미인지 단 1분이라도 검색해 보았다면 저런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소설 속 흡혈귀의 모티브가 된 '블라드 가시공(Vlad the Impaler)'은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조국 왈라키아를 지켜낸 루마니아의 위대한 구국 영웅이다.
자신들의 영웅을 헐리우드 상업 영화의 피 빤 흡혈귀로 희화화하는 것을 루마니아 국민들이 과연 유쾌하게 받아들일까. 외국 정상이 한국에 와서 "진짜로 거리에 호랑이가 다니고 개고기만 먹는지 체험하러 가봐야겠다"고 낄낄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상대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얄팍한 상식조차 결여된 지독한 외교적 결례다.
그렇다면 진짜 격조 있는 정상의 농담이란 무엇인가.
루마니아의 진정한 영웅이나 자랑거리를 유쾌하게 소환해 우리의 실리와 엮어내는 것이 기본이다. 가령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를 떠올리며 "코마네치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완벽한 10점 만점을 받았듯, 한국과 루마니아의 원전·방산 협력도 완벽한 10점 만점을 기록할 것"이라고 덕담을 건넬 수 있다. 혹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단단함처럼 양국의 굳건한 동맹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며 우아하게 건배사를 올릴 수도 있었다. 상대방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면서도 자연스럽게 양국의 비즈니스를 끌어내는 것, 그것이 선진국 지도자가 던져야 할 진짜 '회심의 농담'이다.
하지만 이재명의 머릿속 세계 지도는 할로윈 파티 수준에 멈춰 있고, 좌파 진영의 맹목적인 스피커들은 이 참담한 외교적 결례를 센스 있는 유머로 세탁하기 위해 영혼을 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지만, 그 얄팍한 용감이 국격을 갉아먹을 때는 국가적 재난이 된다.
상대방을 칭찬할 교양 있는 유머 하나 구사하지 못해 남의 나라 구국 영웅을 뱀파이어로 희화화하는 자에게, 도대체 어떤 세련된 글로벌 외교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국제 사회의 냉혹한 테이블 위에서 드라큘라 타령이나 하며 실실대는 빈곤한 지성을 향해 박수를 쳐줄 바보는 오직 국내의 세뇌된 지지자들뿐이다. 품격이 거세된 저열한 농담이 외교의 얼굴을 대신하는 참담한 시대.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국격과 미래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진짜 드라큘라는 과연 누구인지 무겁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원치 않는 타인의 껍데기를 뒤집어쓸 때가 있다. 내 글이 온라인을 타고 번져나갈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지긋지긋한 오해 하나가 있었다. "아, 그 박주현 변호사님?" 매번 손사래를 치며 "저는 그 변호사가 아닙니다"라고 해명하는 일도 하루 이틀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이름이라는 우연의 장난이 참으로 피곤하게 느껴지곤 했다. 내가 벼려낸 차가운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직업과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때론 얄궂기도 했다.
그런데 엊그제,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 한 분을 통해 참으로 기막히고도 유쾌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쓴 글들을 자신의 글로 오해한 사람들 덕분에, 정작 진짜 '박주현 변호사' 본인이 주변에서 "요즘 글 참 예리하게 잘 쓴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런 우스갯소리를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그간 해명하느라 쌓였던 작은 피로감이 일순간 경쾌한 웃음으로 증발해 버렸다.
내친김에 기자는 "이름도 같은데 이 기회에 두 분이 대담이라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흥미로운 제안을 건네왔다. 일단은 "고민해 보겠다"며 정중히 미뤄두었지만, 문자를 끝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그와 나는 서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세한 지향이나 정책적 신념의 결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나의 활자가 그의 그림자가 되고 그의 이름이 나의 껍데기가 되는 이 기묘한 얽힘 속에서, 적어도 그가 나와 정치적 지향점이 아예 정반대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만약 나와 이름이 같은 그가, 아에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매번 "제가 그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해명해야 하는 나의 변명은 한낱 피로감을 넘어, 매 순간 필사적이고 참담한 영혼의 부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 거칠고 살벌한 정치의 계절 속에서, 이름의 오해가 불쾌함이 아닌 유쾌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불행 중 다행'이 주는 작고 따뜻한 위안이다. 서로의 가치를 의도치 않게 공유하고, 때로는 내가 쓴 글이 그의 칭찬으로 배달되는 이 얄미운 우연의 연대. 비록 대담석에 마주 앉을 날이 올지는 알 수 없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와 같은 이름으로 부조리와 맞서고 있을 그에게 속으로 다정한 응원을 건네본다.
오늘도 나는 기꺼이 오해받을 준비를 마친 채,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박주현'의 통쾌한 일갈로 읽힐지도 모를 서늘하고도 따뜻한 문장들을 다시 벼려내야겠다.
평양을 향해선 ‘프리패스’, 국민을 향해선 ‘입틀막’
"에이,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딨습니까? 우리 국민 수준이 얼마나 높은데 그런 거에 속겠어요."
좌파 진영이 국가 안보의 빗장을 풀어젖힐 때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이 해맑고 낭만적인 세계관이 마침내 통일부의 공식 정책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정부가 우리 국민이 친북 단체인 조총련 인사들을 접촉할 때 부과되던 사전 신고 의무를 아예 폐지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무단 접촉으로 과태료를 물렸던 사안을, 이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날 수 있게 족쇄를 풀어주겠단다. 북한의 노선을 추종하는 단체와의 교류마저 '국민의 자유'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보장해주겠다는 눈물겨운 톨레랑스다.
국가 안보를 무장해제하는 이들의 행보를 팩트로 병치해보면 가히 엽기적인 수준이다. 방위 출신에 탈영 의혹까지 꼬리표로 달린 인물을 국방부 장관석에 앉혀놓질 않나, 휴전선 철책이 쑥 밀려 내려와도 태평하질 않나. 이제는 적성국의 전위대 역할을 해온 조총련과의 만남마저 "자유로운 남북 교류"라는 포장지를 씌워 대문을 활짝 열어주려 한다.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종북'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 조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적 상식이건만, 이들은 아예 보란 듯이 안보의 빗장을 뜯어버리며 폭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참으로 기괴하고 서늘한 블랙코미디와 마주하게 된다. 조총련을 만나는 것조차 국민의 자유라며 한없이 관대한 이 '빛의 정부'가, 도대체 왜 자국 국민들의 일상적인 입과 귀 앞에서는 그토록 잔혹하고 옹졸한 사상 통제관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북한 공작 노선을 따르는 단체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국민 수준이 높아 안 속으니 괜찮단다. 그런데 십 대 소녀가 무심코 내뱉은 "무섭노"라는 사투리 한마디에는 체제가 전복될 듯 거품을 물며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고등학생들이 뱉어낸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응원 구호에는 5.18을 모독했다며 야구 생명을 인질로 잡고 묘역에 끌고 가 사상 개조를 강요한다. 힙합 래퍼의 가사가 고인을 비꼬았다는 이유로 음원 유통망을 긴급 차단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입틀막법을 동원해 온라인 게시글에 5배의 징벌적 배상을 매기겠다며 시민의 혀끝을 꿰매버린다.
도대체 이 정권이 바라보는 국민의 지적 수준은 어느 장단에 맞춰져 있는 것인가. 조총련의 주체사상 선동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위대하고 현명한 국민이, 래퍼의 랩 가사나 동네 카페의 커피 브랜드 호명, 십 대 소녀의 사투리 종결어미 앞에서는 뇌가 순백색으로 세탁되어 선동당하는 나약한 개돼지라도 된다는 말인가.
모순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적국을 이롭게 하는 세력과의 교류는 '개인의 자유'로 격상시키고, 자국민이 일상에서 내뱉는 자연스러운 언어와 문화는 '유해 매체'이자 '엄벌의 대상'으로 짓밟는다. 밖으로는 한없이 문을 열어젖히면서 안으로는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거대한 무균실을 만들겠다는 이 극단적인 조현병적 통치.
노동신문을 볼 자유는 세금까지 써서 허용하지만, 국민들의 의견은 서로 신고하라는 정부.
적의 이념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국민의 비판과 풍자 앞에서는 잔혹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권력. 우리는 지금 "빨갱이가 어딨냐"며 웃는 얼굴로 안보를 해체하면서, 당신의 이어폰 속 노래와 커뮤니티 게시물은 현미경으로 털어버리겠다는 기상천외한 사이버 수용소의 완성을 목도하고 있다. 평양을 향해서는 '프리패스'를 끊어주고 자국민에게는 '입틀막' 재갈을 물리는 이 찬란한 기만극을 비웃어주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조총련 인사를 만나는 것은 합법이고 사투리를 쓰는 것은 불법이 되는 완벽한 디스토피아에서 숨을 쉬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기백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안기백으로 개명하는 건 어떨까? 안규백 국방부 장관의 그 뻔뻔한 뚝심 하나만큼은 가히 4성 장군을 능가한다.
억울하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병적기록부를 당당하게 대중 앞에 공개하고 오류를 조목조목 짚어내면 된다. 그런데 국방부의 논리는 상식의 척추를 가볍게 부러뜨린다. "40년 전 잘못된 기록을 공개하면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안 깐다"는 것이다. 명백한 허위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정작 그 허위를 증명할 수사 기록과 '구금 30일'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확답하기 어렵다"며 입을 다문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신비를 청와대와 여의도에 이어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도 목도하게 될 줄이야. 바야흐로 '슈뢰딩거의 병적기록부'다.
가장 배꼽을 잡게 만드는 대목은 기록 정정의 타이밍이다. 안 장관 본인은 이 기막힌 기록 오류를 무려 2016년에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그 10년의 세월 동안 가만히 있다가, 장관 청문회 때 두들겨 맞고 지금까지 논란을 끌고 왔는가.
여기에 대한 국방부의 답변이 예술이다. "장관 신분으로 정정 청구를 하면 권력을 남용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임기를 마치고 권력이 없는 평민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고치겠다"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거룩하고 투명한 권력 분립의 정신인가. 하지만 이 찬란한 핑계에는 치명적인 논리적 블랙홀이 존재한다. 2016년 오류를 발견했을 당시 그는 국방부 장관이 아니었다. 권력이 없던 지난 8년 동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장관 완장을 차고 의혹이 터져 나오자 그제야 '퇴임 후 정정'이라는 기상천외한 예약 시스템을 가동하는가.
"현역병에게 집에서 밥 한 끼 먹였다가 조사를 좀 받고, 여름방학 때 며칠 더 복무한 게 8개월로 기록됐다"는 그 동화 같은 해명이 사실이라면, 군 행정 시스템은 며칠을 8개월로 부풀리는 시공간의 마술사란 말인가. 국민을 바보로 여기지 않고서야 이런 얄팍한 동문서답을 브리핑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다.
자기 병적 기록부 하나 공개하지 못해 쩔쩔매는 자가, 3군 사관학교를 통합하겠다며 군의 근간을 뒤흔들고 식중독 걸린 예비군에게 썩은 밥을 먹인 국방부의 수장이라는 사실이 작금의 대한민국이 마주한 가장 서늘한 안보 참사다.
종합하면 이거다. "탈영은 명백한 허위다. 하지만 기록은 공개하지 않겠다. 고치는 것도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 우아하고도 오만한 유체이탈 화법 앞에서는 스티브 유조차 무릎을 꿇고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 군의 명예를 진흙탕에 처박으면서도 권력의 단물은 임기 끝까지 빨아먹겠다는 그 대단한 기백에 기립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증거를 감추고 혀끝으로만 쌓아 올린 변명의 제단은, 결국 그 알량한 거짓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장 참혹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아침 일찍 댓글에서 한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지역 행정의 곪아 터진 문제들을 지적하자, 타지역의 부패 사례를 나열하더니 호남이 다른 지역처럼 부패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힘으로 누르려 할 때 입 닥치고 엎드리지 않기 때문에" 차별과 멸시를 받는 것이라며 비장하게 항변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나는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타지역도 잘못하면 비판 받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비판을 지역비하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호남을 '권력에 핍박받는 약자'로 바라보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가로지르는 거대하고도 섬뜩한 '인식의 단층'을 마주하게 된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이 지역은 더 이상 핍박받는 변방이 아니다. 천조 원의 자금과 혈세가 들어가리라는 국책 사업을 유치한다면서 다른 지역이라면 당연히 거쳤어야 할 피 말리는 예비타당성 조사도 없이 정치적 명분 하나로 그 엄격한 문턱을 얼레벌레 넘어가지 않았나?.
대다수 국민의 눈에 호남은 어느새 이념이라는 무기를 쥐고 다른 지역과 헌법 위에 군림하는 옥상옥(屋上屋)이자, 특권 지역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특혜를 주어도 그것이 특혜인 줄 모르는 것처럼 비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그 지역의 내부를 지배하는 정서는 여전히 50년 전의 서러운 '피해자 서사'에 갇혀 있다.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외부의 시선과, 영원히 차별받고 있다고 믿는 내부의 맹신. 이 무지막지한 갭(Gap)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합리적 대화나 상식적인 비판도 성립할 수 없다. 부패를 비판하면 혐오가 되고, 행정의 무능을 지적하면 지역 차별이라는 방패가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인 인지부조화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상처가 아물지 못하게 덧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이나, 영화 '말아톤'의 어머니를 보며 가슴 깊이 감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상처를 핑계로 품에 안고 동정하지 않았다. 때로는 냉정하고 잔인해 보일 만큼 세상의 차가운 물에 손을 집어넣게 하고, 스스로의 두 발로 달리게끔 등을 떠밀었다. 상처와 장애를 극복하고 한 명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홀로 서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자 어른의 책무다.
그러나 호남을 수십 년간 지배해 온 정치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은 아이가 스스로 일어설까 봐 두려워하는 고전 소설속에 박제된 나쁜 양부모 같다. 행여나 상처가 아물어버리면 더 이상 앵벌이를 못시킬까 두려워하는 3류 소설속 양아치 두목같은 느낌 그대로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딱지가 앉은 상처를 칼로 후벼 파며 피를 내고, "너희는 영원히 핍박받는 약자이니 오직 나에게만 기대라"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시전한다. 상처를 극복하게 돕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숙주 삼아 자신의 권력을 연명하는 기생충의 생태학.
이러한 위선의 정점에는 "왜 광주는 대대손손 희롱에 용서만 해야 하느냐"며 피를 토하듯 한탄한 박지원 의원이 서 있다. 그의 그 애절한 '대대손손' 타령 앞에서는 인간 존재의 얄팍함에 서글픔마저 밀려온다. 그의 두 딸은 모두 미국 시민권자다. 본인의 핏줄은 대대손손 호남은 커녕 대한민국의 굴레를 벗어나 태평양 너머의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에서 미국인으로 살아갈 텐데, 어찌하여 호남 땅에는 대대손손 영원한 피해자의 굴레를 뒤집어씌우려 하는가. 내 자식은 미래로 향하는데, 표밭의 민중들은 과거의 상처 속에 박제되어 영원히 표를 바치는 노예로 남아주길 바라는 거 아니냐는 말이다.
50년 전의 불행한 역사적 아픔을 부정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무능과 부패를 덮는 영원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그 땅과 사람들을 존중한다면, 이제는 억지스러운 피해자 코스프레의 무대에서 그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대대손손 미국에 살 위선자들의 정치적 제단 위에서,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예향의 도시라던 자부심 넘치던 민중들이 언제까지 영원한 환자로 복무해야 하는가. 상처를 핑계로 주저앉히는 달콤한 위로를 거부하고 차가운 이성의 땅으로 걸어 나올 때, 비로소 그 지긋지긋한 대대손손의 족쇄도 끊어질 것이다
안규백의 기막힌 '믿음 타령'을 듣고 있자니 뜬금없이 바다 건너 미국의 한 유명 가수가 떠오른다.
1990년대를 휩쓸었던 알 켈리(R. Kelly).
"I Believe I Can Fly(나는 날 수 있다고 믿어)"라는 희대의 명곡을 부르며 전 세계인에게 믿음과 꿈의 아름다움을 전도했다. 그 거룩하고 웅장한 가사에 얼마나 많은 대중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가. 하지만 그 눈부신 믿음의 끝은 어떠했나. 2021년 9월 납치, 매수, 성매매, 미성년자 성착취 등의 14개 혐의로 이루어진 공갈 1건과 그 외에도 국제 성매매를 금지하는 Mann Act 위반 관련 추가 8건으로 총 9건의 범죄에 대해 모두 유죄 판결이 났다. 공갈 혐의의 경우 14건의 혐의 중 검찰이 2건 이상을 증명하면 유죄 확정이었는데, 2건을 제외한 12건 모두 증명되었다고 한다.
날기는 커녕 도합 31년형 사실상 평생을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지내야 할 팔자다.
애초에 믿음은 부탁이나 강요가 아니라 증거나 행적으로 생기는 거 아닐까?.
뭐가 어쨌든 노래가 유죄받은 건 아니니 오랫만에 리메이크 곡으로 찾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닳고 닳은 어른의 눈에 비친 초원의 집
어린 시절, 빛바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통해 만나던 '초원의 집'은 나에겐 마치 한국의 '전원일기'와 같은 온기의 상징이었다. 척박한 서부의 땅을 일구면서도 이웃과 빵을 나누고, 소박한 식탁 위에서 가족의 사랑과 이웃 간의 연대를 확인하던 그 투박한 풍경들은 국경과 시간을 넘어 마음 한구석을 다정하게 덥혀주었다.
최근 이 명작이 리메이크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재생해 봤다. 원작이 품었던 그 뭉클한 인간애를 과연 현대의 문법으로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기대와는 다르게 한편으로, 내 안에서 뜻밖의 씁쓸한 이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백인 개척자 가족이 인디언 원주민이나 흑인 이웃과 아무런 편견 없이 동등하게 어울려 웃음 짓고 식사를 나누는 장면. 어린 시절에는 그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인류애의 모습으로 가슴 벅차게 받아들였던 그 풍경이, 이제는 왠지 현실성 없는 억지스러운 판타지나 강박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피부색과 출신이 달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 어울려 사는 그 순수한 풍경을 보며 감동하기는커녕, 작위적인 의도나 이념적 메시지부터 의심하려 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웃과 조건 없이 연대하는 아름다운 서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내 마음은 언제부터 이토록 닳고 닳아버린 것일까.
아마도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분법적 갈등과 혐오에 찌들어 살아왔다. 특히 스스로를 도덕적 파수꾼이라 여기는 정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세상을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으로 쪼개고 분열시키는 데 익숙해져 왔다. 남자와 여자, 세대와 세대, 이젠 심지어 사투리나 일상적인 농담 하나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낙인을 찍고 갈라치는 시대. 이질적인 존재들이 서로의 다름을 품어주며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낭만은 그저 동화같은 판타지가 되버렸다.
매일같이 뉴스에서 누군가를 혐오하고, 좌표를 찍어 매장하고, 이견을 인정하지 못해 징벌적 법안으로 입을 틀어막으려는 살벌한 광장. 갈등을 조장해야만 권력의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정치꾼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동안,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평등한 어울림은 이젠 낯설다.
내가 '초원의 집' 속 평화로운 공존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고 판타지란 생각에 휩싸이게 된 것은, 나 스스로가 다름을 포용할 능력을 철저히 거세당했기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마음이 가난해진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더 이상 그 이면의 순수함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종과 이념을 넘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뜯는 그 평범한 온기가 우리에게 이토록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다가온다면,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이 사회의 토양은 대체 얼마나 메마르고 피폐해진 것인가.
어릴 적 낡은 텔레비전 앞에서 느꼈던 그 다정한 인간애를 영영 잃어버린 채 날 선 의심과 편견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얄팍한 정치적 계산과 혐오의 렌즈를 벗어던지고 서로를 그저 한 명의 이웃으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너른 초원을, 우리는 아니, 나는 다시 마음속에 일구어낼 수 있을지 무겁게 되묻게 된다.
<항소하면 바로잡아 집니다. 구자현 검찰은 부당한 항소포기 이제 그만두세요.>
오늘 대북송금 제3자뇌물 사건의 김성태 부분에 대해, 1심에서 공소기각을 선고한 사건이 항소심에서 파기환송되었습니다. 즉, 공소제기에 문제가 없으니 제대로 판결을 하라는 것이지요. 2심에서 잘못된 1심을 바로잡았습니다. 이로써 대북송금 사건 중 이재명 대통령 부분은 중단되었지만, 나머지 김성태, 이화영 부분은 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 중 다행입니다.
대한민국은 3심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1심판결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항소하면 항소심에서 바로 잡힙니다.
이렇게 바로잡히라고 3심제를 채택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저 3심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검찰에서 항소를 그냥 포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도 항소가 어려웠습니다. 항소 만기날까지 항소 결정이 안나와서 저는 정말 피가 마르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만기날 가까스로 항소가 되었고, 그 결과 2심에서 바로잡아진 것입니다. 대북송금 사건에 대해 재판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건은 정말 다행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록 항소포기하여 영영 처벌하지 못하고 면죄부를 줘버린 사건들이 눈에 밟힙니다.
대장동, 위례 사건, 국회돈봉투 사건 그리고 최근 이재명 캠프 쪼개기 후원사건 까지.......
분명히 이 범죄들도 항소했으면 바로잡아 처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자현 검찰은 수사검사들 의견도 듣지 않고 자의적으로 포기하고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선사하였습니다. 저런 대형사건들을 무죄받고도 석연찮게 항소포기해놓으니 수사검사들에게 책임도 못묻습니다. 책임 물으면 항소포기의 부당성이 드러나니까요. 그럼 도대체 저 범죄 처벌하라고 검사들에게 사건 맡긴 국민들은 뭐가 됩니까.
검사가 왜 범죄에 항복합니까?
검사가 왜 잘못된 판결이 바로잡힐 기회를 포기합니까?
검찰이 그렇게 범죄자를 위해 범죄 봐주면, 피해자는 도대체 누가 보호합니까?
범죄와 싸우라고, 잘못된 재판 바로잡으라고, 피해자 보호해주라고 그러라고 검사가 있는 것 아닌가요?
이 판결을 계기로 부당한 항소포기가 더는 없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더 잘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스템을 망가뜨리지만 말아주세요.
그냥 법대로 상식대로, 정상적으로만 하자는게 왜 이리 힘든가요?
이 귀중한 파기환송 판결 계기로 진심으로 요청드립니다.
구자현 검찰은, 부당한 항소포기 이제 그만 두세요.
검사가 원래 역할대로, 범죄와 싸우고 잘못된 재판 바로잡고 피해자보호할 수 있게, 제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시중의 뼈아픈 농담처럼, 스티브 유의 진짜 패착은 병역 기피가 아니라 줄서기의 실패다. 만약 그가 일찌감치 좌파 카르텔에 합류해 눈물의 충성 맹세를 바쳤다면 어땠을까. 스티브 유 정도는 우파에게 핍박받는 영웅으로 세탁해 당장 가수 활동 재개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조롱이나 비약이라 생각한다면, 작금의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인 안규백의 찬란한 이력과 성적표를 차갑게 직시해 보라.
단기 사병, 이른바 '방위' 출신에 심지어 탈영 의혹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인물이 한 국가의 군령과 군정을 총괄하는 수장 자리에 앉았다. 백번 양보해 군 경력이 짧아도 탁월한 행정력과 뚜렷한 안보 비전이 있다면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장관석에 앉아 벌인 짓거리들은 안보 참사를 넘어 한 편의 기괴한 슬랩스틱 코미디다.
육·해·공군의 고유한 전문성과 역사적 전통을 무시한 채, '3군 사관학교 통합'이라는 무지성 포퓰리즘 카드를 던져 군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그가 책상머리에서 펜대를 굴리는 동안, 북한은 비무장지대 철책선을 우리 코앞까지 쑥 밀고 내려오는 전대미문의 도발을 감행했다.
어디 그뿐인가. 국가의 성역이어야 할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관에서는 기상천외한 사상적 무장해제가 벌어졌다. 6.25 전쟁을 중국 공산당의 침략 미화 프레임인 '항미원조'의 시각으로 가르치겠다는 초등학생 해설 프로그램과 교사 연수가 버젓이 기획되었다가 여론의 철퇴를 맞고 취소되는 촌극이 터졌다. 피 흘려 나라를 지킨 호국의 전당에서 참전 용사들을 유린한 침략자의 선전문을 교재로 쓰려 했던 이 기막힌 이념적 붕괴. 이것이 바로 안규백 체제가 보여준 안보의 현주소다.
더욱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예비군들을 대하는 이 정권의 끔찍한 태도다. 예비군이 훈련 중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발생했고, 집단 식중독에 걸려 쓰러지자 고작 지사제 몇 알 쥐여주고는 다음 날 똑같은 불량 급식 업체의 밥을 다시 입에 밀어 넣는 엽기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병사들을 국가의 귀한 자산이 아니라 쓰다 버리는 소모품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안보의 꼭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처참한 무능과 이념적 붕괴가 폭로될 때마다 좌파 진영은 아주 편리하고 얄미운 핑계거리를 하나 꺼내 든다. 평소에는 한미 연합훈련을 반대하고 반미 선동에 앞장서던 자들이, 이럴 때만 갑자기 미국의 선진 제도를 예찬하며
"미국도 민간인 출신이 국방장관을 하는 '문민통제'가 원칙"이라며 핏대를 세운다.
참으로 얕고 빈곤한 지적 허영이다. 그들이 앵무새처럼 들먹이는 미국의 대표적인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 제8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진짜 궤적을 안다면 감히 작금의 국방부 수장 따위와 비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좌파들은 맥나마라를 그저 포드 자동차 사장 출신의 넥타이 맨 기업인으로만 안다. 하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 중령으로 전역한, 작전 분석과 통계 효율성의 천재였다. 일본의 숨통을 끊은 전략 폭격 작전에서 B-17 대신 B-29를 선택하고, 일본 전통 가옥의 특성을 분석해 저공 소이탄 폭격을 기획한 것이 바로 이 양반의 통계 분석이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그 유명한 도쿄 대공습 작전을 데이터로 완벽하게 뒷받침해 승리를 이끈 전쟁 영웅이다.
훗날 그가 국방장관 자리에 앉아 "유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육·해·공군 전투기를 통합 설계하라"고 지시했을 때, 콧대 높은 3성, 4성 장군들이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감히 반항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군복만 벗었을 뿐, 전장을 꿰뚫는 압도적인 전문성과 데이터 분석력으로 군 수뇌부의 논리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진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압도적인 군사·행정 천재가 확립한 미국의 문민통제 시스템을, 방위 출신에 탈영 의혹을 받고 중국의 '항미원조'를 국방부 마당에 끌어들이며, 식중독 걸린 예비군에게 어제 먹인 썩은 밥을 다시 먹이는 무능한 정치꾼의 방탄용으로 끌어다 쓰는 것은 미국 안보사에 대한 모독이자 지독한 블랙코미디다.
전쟁과 안보는 얄팍한 진영 논리나 유튜브 댓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성도, 책임감도 없는 자들에게 전리품 나누듯 국방의 심장부를 내어준 대가는 결국 군의 사기 저하와 철책선의 붕괴, 그리고 평범한 청년들의 개죽음으로 돌아온다. 자격 없는 자들의 짝퉁 문민통제를 걷어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안보의 골든타임은 저 무능한 관료들의 책상 위에서 가장 허망하고 참혹하게 썩어갈 것이다.
반년이상 연재하다 스스로가 급격하게 재미가 떨어져서 멈췄던 역사이야기를 오랫만에 하나할까 한다.
근래에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 사회 전체가 거대한 심문실이 되어버렸다는 적막한 예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누군가의 과거 발언, 무심코 흘린 단어 하나, 오래전 맺었던 인간관계까지 탈탈 털어 무결점을 증명해야만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시대. 티끌만 한 이념적 불순물이라도 발견되면 여지없이 광장의 단두대에 올려 사회적 생명을 끊어버리는 맹렬한 사상 검열의 축제.
솔직히 고백하건대, 누군가를 도덕적 잣대 위에 올려놓고 심판하는 일은 꽤나 짜릿하고 매혹적인 오락이다. 나 역시 한때 좌파의 진영에 머물며 깊은 사유 없이 이성을 잃고 흥분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를 향해 '독재 찬양자'라느니 '반민족행위자'라느니 날 선 낙인을 찍고 몰아세울 때면, 마치 내 자신이 흠결 없는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뜨거운 도덕적 쾌감에 취하곤 했다. 피아를 식별하고 적을 타격하는 그 집단적 광기는, 복잡한 세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쪼개주는 참으로 쉽고도 달콤한 마약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현실의 복잡다단한 지층을 밟아내며 깨달은 서늘한 진실이 있다. 완벽한 도덕과 이념의 순수성만으로는 국가의 미래를, 아니 평범한 이들의 내일조차 한 발짝도 전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 어느 과학자의 궤적을 떠올려 보면 그 역설은 더욱 선명해진다.
1969년, 인류를 달에 보낸 미국의 아폴로 계획 중심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르너 폰 브라운이 있었다. 그의 이력은 우리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물로 덮여 있었다. 그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친위대 SS 장교였고,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과 포로들을 착취해 V-2 로켓을 만들어 런던에 죽음의 비를 내리게 한 명백한 전범이었다.
만약 작금의 대한민국 광장에 그가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두뇌 속에 든 우주를 향한 도면은 펼쳐보지도 못한 채, 도덕적 십자포화 속에서 그가 만든 로켓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반인륜적 독재 부역자로 몰아세우며 처단한 뒤, 그 알량한 도덕적 우월감을 안고 영원히 우주 경쟁에서 도태되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미국 수뇌부가 그의 끔찍한 나치 행적을 도덕적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냉전이라는 혹독한 체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의 압도적인 과학적 재능을 국가의 미래를 위해 철저히 '이용한' 것뿐이다.
과거의 흠결을 심판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보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기술을 온전히 빨아들여 소련을 압도하는 것이 훨씬 더 절박한 '국익'이라고 판단한 차가운 이성이었다. 미국 정부는 그의 쓸모가 다하고 세상을 떠난 뒤에야 굳게 닫아두었던 기밀을 해제하며 그의 전범 행적을 역사의 심판대 위에 건조하게 올려놓았다. 이 잔인할 만큼 냉정한 실용주의가 결국 미국을 달에 꽂았고, 세계의 질서를 재편했다.
다시 우리의 쓸쓸한 광장으로 돌아와 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에너지를 탕진하고 있는가. 개인의 재능과 잠재력, 그 사람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들여다보기 전에, 그가 어떤 이념의 안경을 썼는지, 과거에 어떤 불온한 흔적을 남겼는지를 현미경으로 샅샅이 뒤지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고, 사소한 흠결조차 체제 위협으로 과장하며 밥줄을 끊어버리는 얄팍한 도덕적 결벽증. 내가 한때 매몰되었던 그 달콤한 단죄의 쾌락이, 이제는 사회 전체의 숨통을 조이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 지독한 사상 검열의 무균실 안에서는 그 어떤 천재성도, 세상을 바꿀 혁신도 온전히 자라날 수 없다. 인간이란 본래 모순투성이의 존재이며, 빛나는 재능의 이면에는 종종 어두운 그림자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 그림자를 지우겠다며 사람 자체를 도려내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의 미래를 난도질하는 자해극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며 타인의 내면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옥죄는 사이, 우리의 진짜 미래는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다.
흠결 없는 천사들만 모여 앉아 서로의 사상을 감시하는 거대한 수용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복잡성을 묵묵히 끌어안고 기어코 내일의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해 낼 것인가. 달콤한 이념의 마약에서 깨어나 사상 검증이라는 낡은 잣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저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진흙탕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불행한 그림자로 남게 될 것이다.
1심 송병훈 재판부에서 김성태 대북송금 사건에 대해 황당하게도 공소기각했던 판결이 2심에서 파기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속히 파기되었다는 것은 1심의 공소기각 판결이 얼마나 독자적인 견해에 불과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잡아져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 판결 외에도 1심 송병훈 재판부는, 이화영 위증 등 국민참여재판에서 북한에 부당하게 금송 등을 보낸 혐의에 대해서, 법리나 판례상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공소기각을 선고하였었습니다. 현재 항소심 계속 중이고 역시 항소심에서 바로잡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요 사건 재판에서 연속적으로 공소기각을 선고하는 송병훈 재판부에 대해, 그럴리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송병훈 재판부는 이화영 대북송금 사건에 대해서 행여나 독자적인 견해를 근거로 공소기각 등으로 실체 판단을 모면할 생각을 추호라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실하게 실체 판단을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새미래민주당#모두발언#이미영#언론의역할
대한민국 언론은 과거보다 더 타락했습니다
환율대란, 참정권 유린,
국민 검열법 시행, 국방부장관 대형 추문 등
수많은 사건에도 침묵합니다
보았으나 싣지못해 싸웠던 선배들의 유산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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