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e vídeo do menino que pisou no rabo do gato sem querer, o gato amigo foi se vingar na força do ódio, o menino se desesperou, o doguinho foi defendê-lo e a paz familiar foi completamente destruída sempre merece ser postado.
《귀족에 대해 알아보자》
1. 귀족이란 대저, 대대로 세습되는 극소수(대체로 인구의 1~2퍼센트 이내.)의 통치 엘리트 집단을 이루며 저들끼리만 통혼하는 집단을 이름. 이들은 인격과 정체성에 관한 관념에 기초한 차별적 출신을 정당화하는데, 출생을 통해 특수한 자질을 물려받으며, 어릴 때부터의 체계적인 교육이 이러한 그것을 정제하거나 강화한다고 봄.
- 마치 아동기의 외국어 학습처럼, 조선의 양반 어린아이들은 아주 어릴때부터 이런 자질을 내면화하는 강도높은 커리큘럼을 겪음. 그런면에서 귀족은 다른 언어를 쓰는 내부적 외국인이라고도 할 수 있음.
- 서울과 지방의 격리에 따른 귀족들의 분화는 세계사적으로 일반된 경향으로 보임. 지중해 인근 귀족들은 전통적으로 도시에, 북방의 귀족들은 농촌에 거하는 경향이 있는 등 환경에 따라 거주 양상은 달라졌지만, 지역기반 귀족이 서울의 조정에 나아가기 어려워했던 것만은 공통적임.
"모든 것이 비싼 값을 지닌 조정에 나아가면 귀족들은 곧 파멸한다. 반대로 그들이 자신들의 성에 머물며 사적이고 소박한 삶을 영위할 때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다."
"귀족들은 지방에서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서울 조정에선 윤택하지만 노예적 존재다." ─ 16세기 프랑스를 관찰한 이탈리아인
2. 한국에서는 같은 '귀족'으로 번역되지만, 실상 nobility와 aristocracy는 서로 구별되는 개념. nobility는 법적으로 정의된 특권집단이고, aristocracy는 사회적으로 구별된 동질적이고 모호한 덩어리를 의미함. 전자는 분명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반면, 후자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무게감에 따른 상대적인 범주임.
- 조선 양반의 경우, 팔의(八議)에 의해 사법적 특권을 지녔던 경화사족 훈척벌열이 nobility에 해당하고, 또한 여기에 지방에서 노비를 거느리는 향반들까지 포함시킨다면 그들은 큰 aristocracy에 해당했다고 거칠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임.
3. 서유럽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귀족(aristocracy)이 사법적 귀족(nobility)으로 발전, 결합하는 경향이 관찰됨. 그러니까 법적인(de jure) 신분과 사실상(de facto)의 신분이 일치하는 추세가 존재함.
- 프랑스의 경우 12세기에는 단순히 개인이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면 귀족이 될 수 있었음. 13세기 중반에는 조상이 귀족이거나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을 구매해야만 귀족이 될 수 있었음. 이런 식으로 국가의 발달과 함께 사회적 귀족에 따르는 세세한 사법적 특권과 비귀족에 대한 의복 및 사치 규제법도 발맞추어 정교해졌음.
- 반면 중세 영국의 경우에는 국왕이 특허장을 발부하지도 않았고, 엄밀한 의미에서 14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법적 작위 귀족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겨짐. 그저 귀족은 귀족처럼 옷을 입고 체면을 잃지 않는 멋쟁이라면 누구나 귀족이라 할 수 있다는 정도로 모호해보임.
- 그러나 이미 반세기도 더 전의 영국 역사학자들은 의회에 소집될 책무가 있었던 이들로만 귀족을 한정시켰고, 적어도 그 baron들 사이에서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자신들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그들만의 배타적 동료의식을 함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귀족 개념을 추출해냈음.
- 최근에는 문장학을 중심으로 어떤 집단이 귀족으로 간주되었는지 구별해보는 방식도 각광받고 있다는데, 이건 마치 조선사 연구자들이 족보를 중심으로 어떤 인물들이 중심적인 족보에서 의도적으로 배제, 누락됐는지를 통해 귀족을 구별하는 것과 비슷해보이지.
- 조선의 경우에는 법적인(de jure) 신분과 사실상(de facto)의 신분이 왕조 말기로 갈수록 괴리되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에서 서유럽의 귀족들과 비교하면 결정적인 차이를 보임. 본인은 과거제나 메리토크라시보다도 바로 이 지점이 양반 귀족 논쟁을 가르는 핵심 지점이라 봄.
- 그러나 꼭 '귀족' 개념을 서유럽의 귀족에만 국한시켜서 "사실상의 사회적 귀족이 법적인 실체로서 진화"해야만 정당한 귀족이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기에는 서구중심적인 태도임. 국왕은 끝까지 훈척(nobility)에 의해 포위돼있었고, 사회적 귀족은 하층민들의 침투를 허락했다고 분리해보아야 함.
4. 조선왕조의 법적인 외관인 양천제를 근거로 들어 조선에 귀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음. 그러나 다른 많은 사회들, 예를 들자면 중세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에서도 귀족이나 여타 특권을 지닌 문벌 집단을 인정하지 않았다("모든 자유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같은 것들 또한 함께 비교해 고려해봐야함. 그렇다면 중세 영국에도 귀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할까? 사리에 맞지 않는 이해임.
- 영국사에서의 젠트리(gentry) 연구사는 조선사에서의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 연구의 훌륭한 선례가 될 수 있음. 젠트리는 상위 바론과 동일한 열망이나 기풍을 공유하지만 위계적으로는 열등한 재지 엘리트를 의미했고, 국왕은 이들을 동원해 지역 관료를 충당했음.
- 일찍이 젠트리 개념 연구는 도대체 젠트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의 모호함으로 악명 높았는데, 그게 도대체 위아래(바론과 농민)로 어떻게 구별되는지, 시기에 따라서는 어떻게 변천하는지, 그 경계선을 명확히 긋기 정말 힘들었기 때문임. 이는 양반 및 중인 연구에서 한국 학자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떠올리게 하지.
- 젠트리의 기원을 지역 기사 집단과 연관 짓는 것이 전통적인 설인데, 문제는 그럼 지역 기사 집단과 젠트리는 어떻게 엄밀히 구별할 수 있느냐는 것임. 그래서 영국에서도 젠트리는 14세기에만 국한시켜야한다는 보수적이고도 개별적 특수성에 집착한 통설이 존재함.
- 하지만 젠트리 전에도 지역 내에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 농민들을 이끌던 토지 기반 일단의 엘리트 세력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보아야함. 그렇다면 이후 시기와 이전 시기의 이러한 '하급 귀족', 앞서 언급했던 '사회적 귀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틀이 있을까?
- 법제사 연구는 적어도 귀족 문제에 접근하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식이 되기 힘듦. 대신 역사학자들은 배타적인 이익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그 자격의 면면에 집중하기 시작한지 오래임. 귀족은, 말 그대로 "척 보면 척" 그들끼리 알아보았으며, 이 폐쇄적 서클은 세계사적으로 보편적인 것.
- 이것이 바로 affinity(근친성, 인척, 인척 동맹)이라는 아이디어로서, 대귀족들이 지방 통치를 위해 재지 엘리트들과 후원, 하사, 계약, 또는 강압으로 묶였던 '인간 관계'에 집중하는 시각임. 이것은 조선사 연구에 있어 향촌의 재지사족과 경화사족 사이의 관계, 그리고 수도 벌열 및 지방 향촌의 통혼권에 집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흐름임.
- 바로 비슷한 시기 옆 나라인 프랑스의 귀족만 하더라도 영국의 젠트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음. 영국의 귀족적 전통이 농토와 묶여 있었던 것과 달리, 프랑스의 귀족은 더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한 이방인 정복자들의 혈통과 세습되는 특권에 결부되어 있었음.
- 이들의 조상은 칼을 들고 갈리아의 우매한 농민들을 노예로 삼았던 자유로운 프랑크인(franc가 자유인이라는 뜻)으로 여겨지곤했음. 이들은 지역의 성채를 장악하고 토지민들에게 명령(ban)을 강제하면서 새로운 의존 관계로 편입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귀족은 끊임없이 하부로 재생산되며 하강하게 됨.
- 이것은 일종의 귀족 문화 전파와 궤를 같이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상부에서 하부로 전파되는 귀족적 '문화 전파' 현상이 세계사적으로 다른 많은 전근대 문화권에서 독립적으로 발견된다는 그 보편성에 있음.
5. 최상층에 위치한 귀족의 문화가 끊임없이 아래로 하강, 재생산된다는 문화 전파 이론은 일찍이 부르디외가 주목했던 '사회적 허세'나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애덤 스미스의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 이익을 얻을 희망이 전혀 없음에도 부유하고 권세있는 자들에게 기묘한 동조심을 갖는데, 그것은 그들이 상상 속에서나마 그렇게 함으로써 부자들의 이점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희대의 통찰과 궤를 같이함.
- 이런 문화 전파 현상은 당연하게도 조선의 귀족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데, 왕실에서부터 향반에까지 서서히 내려져오는 유교적 상장례의 특수한 관습이나 정교한 족보 편찬 및 위조의 전통이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음. 영국에서는 특별한 형태의 깃발, 모자, 그리고 문장이나 인장, 사냥 행위 등에서 엿보임.
- 따라서 만백성이 양반이 되고자 했고, 또 실제로 그게 가능하게 되었던 조선 말기의 상황은 귀족이라는 개념을 부정할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함. "인구의 절반 이상이 양반이 되었다"는 간단한 기술은, 왕조가 멸망의 기로에 들어서 그와 강하게 결부돼있었던 사회적 귀족으로서의 양반 또한 몰락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음.
(나중에 더 보충할 글... 계속 수정 中)
『위 글을 읽기에 앞서 읽어보면 좋을 텍스트』
이성무. (1980).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이성무. (2006). 조선시대 신분구성과 그 특성. 조선시대사학보.
송만오. (2010). 조선 지배층 추적에 이정표를 세운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와 송준호 교수의 공동연구. 한국사 시민강좌
송만오. (2011). 系譜資料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中人의 사회적 지위. 한국학논집
정재훈. (2015). 조선중기 사족의 위상. 조선시대사학보.
전경목. (2025). 제도사적인 면에서 살펴본 조선후기의 양반에 대한 이해-이강욱의 『조선후기 양반제도』(은대사랑, 2023)에 대한 서평-. 조선시대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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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s, P. R. (2003). The Origins of the English Gent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고대인들에게 이런 폭력적 스펙타클은 굉장히 인기있는 행사였음. 기독교인들은 이런 스펙타클을 보면 영혼이 오염된다고 경고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친구 알리피우스가 검투사 경기에 빠지는 모습을 빌어 경고함.
그런데 알리피우스의 일화는 어쩌면 하나의 입덕 과정처럼 보이기도 함.
Prince Kraft zu Hohenlohe-Ingelfingen contested the claim made by the older authors that cavalry never met face to face; as, he says, all squadrons actually did in the 1870 war. His reasoning as to why? Modern cavalry didnt charge as well as the cavalry of those older authors lol
《노비가 노예인 이유》
매매 상속이 가능하고 주인의 사적인 형벌(私刑)이 실질적으로 용인되는 존재, 주인에게 성생활과 번식이 종속된 존재,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도 대대로 종속된 신세,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문란하고 천한 존재로 정당화되는 존재, 가장 거칠고 힘든 일에 강제로 동원되는 존재,
@Smoken_FOX 서양 역사의 귀족도 '세금 걷고 일대 땅의 주인이며 무조건적인 세습'이 아님. 관직 못 구하고 재산 까먹다 보면 몇 대 안에 조용히 사라집니다. 조선에서 3대 동안 과거 급제 못 하면 양반 아니란 것도 명문화된 제도가 아니라 그냥 관습이고 양반은 사실상 세습 신분이었습니다
Lo más perturbador de Philip K. Dick no es lo que imaginó. Es que en 1974 tuvo una experiencia que no pudo explicar con ningún marco racional y pasó los últimos ocho años de su vida escribiendo 8000 páginas intentando entenderla. No lo consiguió.
Tibble does some textual analysis and figures that Armenians were about half of the knights and most of the border garrisons, and Turcopoles (local light cavalry) were more than half the mounted wing of the army. The "Franks" were also mostly mixed ethni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