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넘은 일인데, 학교가는 기차에서 친구랑 떠들면서 친구가 눈 찢으면서 나한테 “에에에 한국사람“ 했음. 그래서 내가 주먹으로 코 만들어서 대고 ”에에에에 독일���람“ 이���단 말임. 그 광경을 경악하며 바라보던 독일 아줌마 한 명이 우리한테 오더니 나한테 거의 울면서 물어봄. “아시아인들은
한편으로 이 미러형 민주화(?) 운동을 보며 우리 20대 극우 남성 친구들에게 좀 온정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죽을 자리 같음. 피는 젊은데 소진할 곳을 잃어 버려 헤맨다는 느낌이 듦. 기존의 민주진보 흐름에도 끼지도 못했고 젊음을 소진할 곳도 없음. 그래서 시뮬만 함.
만약 GTX가 지나가다 진동을 못이기고 삼성역이 무너져내린다 해도 결국 피해자는 강남구 주민들이 아니라 그걸 타고 오가던 경기도민일거고, 강남 사람들은 저걸 무너지게 그냥 뒀다며 오세훈이 아닌 이재명 정부를 욕할거고, 오세훈은 슬쩍 뒤로 빠졌다가 나중에 강남 표를 다시 주워먹겠지.
심지어 저 모든 이야기가 일제시대도 아니고 6~70년대도 아닌, X세대 담론이 한창이던 90년대 중후반 이야기라는 것. 사회가 오랜 군사독재에서 깨어나던 그때까지도, 서태지가 터보가 김건모가 춤추던 그때까지도, 여성들은 객체화되고 관리대상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던 남성 지배 엘리트들 것이었다.
96년 저 장면을 실시간으로 현장에서 목격했던 나는, 도대체 고대생들의 저 '민족'이란 것은 무언가 묻고 또 물었다. 지금은 푹 파서 뭔가 만들어진 그자리가 운동장 비슷한 공터였고, 그뒤 계단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축제에 확 뭐가 끼어들더니 난장판이 됐다. 고대생들은 당당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고대생이 빨간 고무장갑을 머리에 뒤집어쓰더니, 앞에서 선도하고 뒤에 남학생들이 들러붙어 기차놀이하면서 깽판치던 모습. 그걸 계단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던 나는, 저것이 고대식의 정의인가, 생각했다. 이대는 그 역사 자체로 존재의의를 증명한다.
하다못해 임명직 준 이혜훈조차도 90도로 엎어지면서 잘못했다고 사죄하는데, 민주당 간판달고 '선거'에 나가면서 세월호 막말에 조국때려잡기에 게다가 검찰 보완수사권까지. 민주당원들은 흐린눈 해줄 준비 돼있었다니까. 손가락만 씻었다 소리 변명할때도 다 웃어줬잖아. 걍 임명직으로나 쓸것을..
김용남은 이번 기회에 빨간당 시절 했던 말과 행동�� 싹 씻어내고 새출발할 수 있었는데, "그땐 죄송했다" 한마디면 됐을텐데, 그랬으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잼 픽인데 하며 흐린눈해줄 준비도 다 하고 있었을텐데, 그 죄송 한마디를 못하고 혀가 참 긴 것이, 김용남은 거기까진가 보다.
사람 많은 지하철 2호선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멍하니 서서 코앞의 뒤통수를 피해 눈을 들어 문 위를 쳐다보다가, 아, 저기엔 항상 A4지 반만한 스티커가 찰지게 붙어있었는데, 간첩신고 112, 간첩선은 1억. 어느새 그게 다 없어지고 이젠 간첩신고 대신 안동사과가 그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네.
���생 정치해온 사람들을 두고 "돈벌어본적 없이 빌붙어 살아온 기생충"이라며 욕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치란 뭘까. 충돌하는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과 협상을 계속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고도의 행위를 수십년 해온 이들을 그렇게 폄훼하는 이들의 정치혐오가 싫다.
아주 옛날, 진짜 신이 있었다.
이 신은 우리가 아는 신이 아니다. 너무 완벽해서 이름도 못 붙이는 존재. 빛 그 자체. 이 신은 우리 우주 따위 만들지 않았다.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완벽한 자가 왜 굳이 똥을 만들겠나.
이 진짜 신 옆에, 자식 같은 존재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막내딸의 이름이 지혜.
근데 지혜가 사고를 친다.
호기심에.
"아빠가 어떻게 생긴 신인지 나도 한번 알고 싶다."
그 오만한 호기심에서, 끔찍한 게 태어났다.
기형아였다. 사자 머리에 뱀의 몸. 이름은 얄다바오트.
지혜는 부끄러워서 그 자식을 어둠 속에 숨겨버렸다. 못난 자식은 안 본 걸로 한다. 부모도 그렇게 한다.
*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얄다바오트는 어둠 속에서 혼자 자랐다. 자기 위에 뭐가 있는지 본 적이 없다. 자기 어머니가 누군지도, 진짜 신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얄다바오트가 둘러본다. 위를 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옆을 본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결론 내린다.
"음. 아무도 없네. 그럼 내가 신이네."
그러고는 손을 휘저어, 우주를 만들었다.
별을. 행성을. 흙을. 살을. 시간을. 늙음을. 병을. 죽음을.
이 멍청한 자식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만든 거다.
그래서 이���게 굴러간다, 모든 게. 만든 놈이 자기가 뭘 만드는지도 모르고 만들었으니까.
*
그게 끝이 아니다.
얄다바오트는 자기 작품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
근데 흙덩어리가 안 일어난다.
당연하지. 멍청한 신이 만든 거니까. 생명을 만들 줄 모른다.
이때, 위쪽 진짜 세계의 존재들이 몰래 작당한다. 얄다바오트한테 속삭인다.
"야, 네가 만든 건데 네 숨을 한번 불어넣어봐. 그래야 일어나지."
얄다바오트는 우쭐해서 그렇게 한다. 입으로 후... 자기 숨을 흙덩어리에 불어넣는다.
근데 그 멍청이가 모르는 거.
자기가 가진 숨이 사실 자기 게 아니었다.
어머니 지혜한테서 훔친 빛 한 조각. 그게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
그걸 자기 손으로, 아담한테 넘겨줬다.
흙덩어리가 눈을 뜨는데, 얄다바오트보다 더 빛났다.
가��� 신이 자기 손으로 자기 노예를 자기보다 위대하게 만들어버렸다.
얄다바오트는 그 순간 깨닫는다. 그리고 분노한다.
그래서 인간을 가둔다. 몸 안에. 살 안에. 시간 안에. 늙음 안에. 잊어버리게 만든다. 자기가 뭐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그게 너다.
*
자, 이��� 영지주의의 그림.
정리해보자.
네 몸은 멍청한 가짜 신이 만든 감옥.
네 안에 박힌 작은 빛. 그게 진짜 너.
그 빛은 가짜 신이 자기 손으로 너한테 넘겨준 조각이고, 위로 돌아가야 한다.
태어남은 추락.
사는 건 유배.
죽음은, 잘만 하면 집에 가는 거.
*
그럼 어떻게 돌아가냐.
착하게 살아서? 아니.
기도해서? 아니.
회개해서? 아니.
답은 딱 하나. 기억해내는 것.
네가 진짜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이 세상이 함정이라는 걸. 가짜 신이 너를 속이고 있다는 걸.
영지주의에서 예수는 너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러 온 사람이 아니다. 그는 네 진짜 이름을 알려주러 온 전령. 잠든 너를 깨우는 자.
일어나라고.
너 여기 사람 아니라고.
*
이 사상은 정통 교회가 미친 듯이 박멸했다.
1200년대, 프랑스 남부에 카타리파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지주의의 직계 후예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같은 가족. 물질세계는 가짜 신의 감옥이라는 핵심을 공유했다.
교황이 십자군을 보냈다. 1209년부터 1229년까지 마을들을 통째로 불태웠다. 베지에에선 한 명도 안 남겼다. 어린애까지. 그러고도 안 끝났다. 종교재판이 100년을 더 작업한다. 마지막 카타리 신부 기욤 벨리바스트가 산 채로 화형당한 게 1321년.
한 세기에 걸친 절멸.
마지막 카타리를 태운 종교재판관은 교황이 되었다. (베네딕토 12세)
그런데도 안 죽었다, 이 사상은.
*
1974년 3월, 캘리포니아.
필립 K. 딕이 환각을 본다. 분홍색 빛이 자기 머리를 관통했다고. 그 후로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8천 페이지짜리 노트를 미친 듯이 쓴다. 자기가 본 게 영지주의의 그 빛이라고 확신하면서.
이 사람이 살아있을 때 쓴 소설들이 영화가 됐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리고 그를 직접 읽고 자란 워쇼스키 자매가 만든 게 매트릭스.
네오가 빨간 약 먹고 이 세상이 가짜라는 ��� 깨닫는 것. 영지주의.
트루먼 쇼. 다크 시티. 인셉션. 다 같은 줄기에서 뻗은 가지들.
너는 이미 영지주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살아왔다.
몰랐을 뿐이지.
학습을 '게임화'한 교육계의 중대 실책
보조 도구라는 제자리로 돌려놔야
(아래 원문 발췌)
예전엔 학교에서 ‘재미’가 지적 흥미를 뜻하는 교육적으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다 화면이 수업 시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학교를 ‘재미’있게 만들고 온라인 게임 시장의 성장에 발맞춰 학습 개인화 요구에 부응했다.
하지만 이는 지난 10년 동안 초중등 교육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모든 아이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제공하고, 표준화 시험 준비부터 쉬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게임화하기로 한 결정 말이다. 학습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거대 기술 기업들의 선전과 결합돼 학교의 존재 목적을 왜곡해 버렸다. 기술은 교육의 근원이나 정점이 아니라 보조 도구로서, 교실 내에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초중고 교실에 더 많은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는 코로나가 학교를 화면 속으로 밀어넣기 전부터 직관적으로 그럴듯해 보였다. 성인들이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최신 개인용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교실에서도 분명 학습 효율을 높이고 학생들을 현대적인 직장에 대비시키는 데 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아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생각도 있었다. 화면 속에서 자라난 만큼 그들 뇌는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교사들은 짧은 집중력을 고려하고 책을 멀티미디어 수업으로 대체함으로써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 가르쳐야 한다. 수학과 언어 과제가 비디오 게임과 비슷해질수록 학생들은 더 많이 배울 것이다.
이 주장의 모든 단계가 틀렸다. 연구 결과, 전 세계 부국들의 시험 점수 하락과 교내 기기 도입 확대 간 상관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13세 학생들의 수학과 읽기 점수는 2012년에 정점을 찍은 후 하락해 왔다.
직장과 교실의 동일시는 청소년은 성인과 다르게 배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청소년은 훨씬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하며 다양한 감각 활동을 경험해야 한다. 저학년에서는 모래와 블록 놀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 경우 역사는 고등학교 시절 ‘중세 시대’ 축제에서 직접 만든 의상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왔다. 특히 차에 적셔 오븐에서 갈색으로 구워내며 연대표 과제를 ‘진짜 중세풍’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기억에 남는 감각적 활동이 그랬다.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개념은 신화일 뿐이다. 아이폰과 노트북의 등장이 수천 년에 걸친 뇌의 진화를 불과 몇 년 만에 뒤집지는 못했다. 비록 과도한 화면 시청 시간이 대뇌 피질의 얇아짐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뇌의 가소성 덕분에 이런 손상은 회복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선호도를 깊은 생물학적 현실로 오해하고 있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만 그 취향에 맞춰 매 끼니를 아이스크림으로 시작할 순 없다. 아이스크림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나 채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신간 <디지털 망상>은 학교를 뒤덮은 수많은 디지털 기기와 소프트웨어, 이른바 에듀테크의 과용이 학습에 미치는 해악을 입증하는 방대한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연구에 따르면 학생들이 화면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이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집중력도 함께 줄어든다. 강의 시간에 노트북을 사용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시간당 평균 38분을 수업과 무관한 일에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글 시대라 해도 구식 암기법은 여전히 중요하다. 클라우드가 아닌 우리 뇌에 저장된 지식이야말로 창의적 사고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가장 교묘한 교육 기술 침투의 측면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평가하며, 즐겁게 하기 위해 비디오 게임 스타일의 앱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앱들은 학생들이 점수, 배지, 그리고 기타 디지털 도파민 자극에 집착하도록 부추기는 광범위한 ‘게임화’ 풍조를 조장하고, 진정한 학습이 요구하는 실험, 좌절, 분투를 기피하게 만든다.
문제는 게임 그 자체가 아니다. 훌륭한 교사들은 게임을 활용해 학생들의 동기를 부여하고 친구들과 유대감을 형성해 왔다. 하지만 지난 15년여 동안 활기 넘치던 아날로그 게임의 소란은 조용한 교실로 대체되었고, 학생들은 ���드폰을 끼고 화면 속 활동을 스와이프하고 스크롤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컴퓨터 게임의 설득력 있는 디자인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없이 오직 화면만 보며 계속 사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클릭만 할 뿐,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읽지도 않는다. ‘무슨 질문인지 대충 알겠으니,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클릭할게’라는 식이다.
온라인 게임의 과용 그리고 일반적으로 화면 기반 기술의 사용은 ADHD와 자폐증 학생들에게 특히 해로울 수 있다. 읽기, 쓰기, 다감각적 참여 같은 필요한 기술을 기르는 대신, 좁은 범위의 패턴 인식만 익히게 된다. 또 학생들은 어려운 사회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트북을 사용한다. 아이들은 수업마다 기기들을 들고 다니는데 대인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면 그냥 컴퓨터를 꺼내서 비디오 게임을 하곤 한다.
어떤 종류의 학습이든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고 모호함을 헤쳐 나가며 실패에 대처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너무 잦은 온라인 게임은 마찰 없는 가짜 ���입감을 주고 좁은 범위의 기술만을 키우며 모든 질문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가정을 조장한다. 기술을 적용하는 맥락이 다양할수록 기술의 폭은 넓어지지만 컴퓨터는 지독하게 좁다. 학생들은 게임에 능숙해지고 점수는 올라가겠지만 화면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기술의 대부분은 사라진다.
수업을 게임화하면 학습 효과를 높이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제품에 더 오래 몰입하도록 주의를 끄는 것일 뿐이다. 아동 발달과 상충된다. 아이들은 화면 앞에서 몇 시간씩 보내서는 안 된다.
반기술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기술을 의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아이들도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워야 하지만 6살에게 아이패드를 주어 읽기를 배우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해결책은 신중한 절제다.
학교는 학생들이 노트북과 태블릿을 자신의 신체 일부처럼 여기도록 부추긴 1대1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 디지털 게임은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단, 도파민 분비를 기대하며 홀로 화면을 스크롤하는 것보다 협업, 창의성, 그리고 도전 정신을 강조할 때에 한해서.
올바른 ���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교사, 행정가, 가족들이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대학 및 직업 준비가 뭘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존 합의가 무너져 가던 시기에 학교들이 교육 기술에 빠르고도 심하게 매료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십 년간 미국 역사와 과학 교과 과정을 둘러싼 문화 전쟁 논쟁이 공립학교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많은 연구자들은 공통 핵심 국가 교육 과정 기준을 실패작이라고 평가해 왔다. 이제는 엘리트 사립학교들조차 자기 목적을 정의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서구 정전을 대체할 개인적 취향과 정체성 범주들의 뒤죽박죽이 뭘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학력 부모들조차 학교의 더 깊은 목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자녀를 원하는 대학에 어떻게 보내야 할지만 생각할 뿐. 그 결과 모두가 여전히 한 가지 점엔 동의한다. 혁신이 많을수록 좋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방향을 잡아줄 닻이 없는 상황에서 기술이 그 공백을 메워주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중립적인 기술은 없다. 교육의 모사품을 제공하는 앱과 게임들은 학생들이 특정 세계관, 즉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을 흡수하도록 부추긴다. 결국 학생들은 학습이라는 게 체크리스트를 채우고, 패턴을 인식하며, 개별 과제를 완수하고 ‘레벨 업’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해 개방형 논술 문제나 그 밖의 모호한 상황들에 직면했을 때, 즉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이 모든 것의 의미를 파악하려 할 때 그들은 당황한다. 교수가 소설 한 권을 통째로 읽으라고 요구하면 그 과제는 감당하기 힘들게 느껴진다.
그들은 게임화된 시스템을 숙달함으로써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것은 세상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다. 에머슨은 저서 <자립>에서 진정한 교육이란 성취를 위한 알고리즘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었다: “광활한 우주는 선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영양가 있는 옥수수 알갱이 하나도 자신의 수고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진지한 지적 작업과 도덕적 추론은 게임화될 수 없다.
빵이 책상 위에 있다.
반 쪽. 옆방 노이만 씨가 방금 준 것. 그는 유대인이다. 유리 공장에서 일했고, 지금은 빵집에서 남은 빵을 얻어 온다. 그중 반을 방금 내게 주고 갔다.
"오늘 그림 잘 되셨습니까, 히틀러 씨?"
나는 고맙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그때는.
지금은 아니다.
*
빵은 삼십 분째 저기 있다.
나는 먹지 않는다.
왜 먹지 않는가.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그가 빵을 준 것이 오늘이 세 번째다. 시월에 한 번. 십일월에 한 번. 오늘.
한 번은 친절이다. 두 번도 친절이다. 세 번은...
세 번은 뭔가 다른 것이다.
세 번이면 그는 계속 주는 사람이고, 나는 계속 받는 사람이다. 이 관계가 굳어 버린다. 주는 사람은 위에 있고, 받는 사람은 아래에 있다.
나는 그의 아래에 있다.
이 방 안에서. 멜데만 거리의, 백이십 명이 사는 이 하숙집에서. 나, 이 도시 출신의 독일인이, 발칸에서 흘러온 유대인 유리 세공사의, 아래에.
*
아니다.
이건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노이만 씨는 그냥 친절한 사람이다. 빵이 남았고, 내 방이 그의 옆방이고, 그래서 주었다. 끝.
나는 이걸 안다.
아는데, 이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
배가 고프다.
빵은 바로 저기 있다. 세 걸음. 팔을 뻗으면 끝난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빵을 먹으면, 지난 삼십 분 동안 내가 한 생각이 바보 같은 것이 된다. 나는 삼십 분을 버린 사람이 된다. 빈 하숙집 방에서 빵 하나 앞에 두고 삼십 분을 낭비한 스물한 살짜리. 그게 나다.
그게 나여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옳아야 한다. 옳으려면, 빵을 먹지 말아야 한다. 먹지 않는 동안에만, 내 삼십 분이 의미가 있다.
*
이것이 내가 방금 한 일.
나는 빵을 먹을 수 없도록, 내 머릿속에서 이유를 만들었다. 배가 고픈데도 먹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그 이유의 이름은 '노이만 씨가 나보다 높다' 이다.
실은 아무도 나보다 높지 않다. 노이만 씨도, 그 누구도. 그는 빵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나보다 높다고 정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내가 이 삼십 분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내 고통을 설명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옆방의 친절한 남자를, 적으로 만들었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
- 똑. 똑. 똑.
세 번. 일정한 간격.
"히틀러 씨, 아까 그 빵 말인데요... 며칠 된 거라서, 혹시 상했을까 봐..."
문 너머 그의 목소리. 미안해하는 목소리. 자기가 준 빵이 내 배탈을 일으켰을까 봐, 추운 복도에 서서 물어보는 목소리.
이것이 내가 삼십 분 동안 적이라고 부른 사람이다.
*
문을 연다.
노이만 씨가 앞치마 앞에 두 손을 모으고 ��� 있다. 유리에 베인 자국이 많은 손. 그냥 손. 나보다 위도 아래도 아닌, 그냥 한 남자의 손.
"아니요, 괜찮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안도한다. 미안하다고 한다. 괜히 방해했다고. 슬리퍼 소리가 옆방으로 멀어진다.
문이 닫힌다.
*
나는 문에 기댄다.
거짓말을 했다.
빵은 아직 먹지 않았다. 좋았는지 나빴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아주 좋았다" 고 했다.
왜.
그가 편히 잠들도록. 그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어서. 그것은 친절이다.
그렇다면 나는 방금 친절했다.
그런데 나는 삼십 분 전에 그를 적이라고 불렀다.
같은 혀로.
같은 밤에.
*
두 개의 나.
하나는 친절한 나.
하나는 적을 만드는 나.
같은 몸 안에 둘이 있다.
그리고 오늘 밤, 나는 알았다. 이 둘이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알지도 못하는 척한다. 친절한 나는 문 앞에서 웃고, 적을 만드는 나는 방 안에서 계속 일한다. 따로. 각자.
이 기술을 나는 오늘 밤 처음 배웠다.
*
책상으로 간다.
빵을 집는다.
씹는다.
맛있다.
맛있는 것이 괴롭다. 맛있다는 건 그가 좋은 것을 주었다는 뜻이고, 좋은 걸 받은 사람은 준 사람에게 빚을 진다.
빚을 갚을 돈이 나에게는 없다.
갚을 수 없으면, 방법은 하나다.
준 사람을, 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러면 빚이 사라진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내가 받아 줬으니까.
선술집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이걸 다른 단어로 부른다. 하루에 백 번씩. 발음할 때마다 침이 튀는 그 단어.
나는 그 단어를 경멸한다.
경멸하는데,
지금 내 입 안에서 빵 부스러기가 녹는다.
그 부스러기와 함께, 그 단어도 녹아서 내려간다.
위장으로.
피로.
*
전등을 끈다.
어둠 속에서 입술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느낀다. 혀로 밀어내지 않는다. 내버려 둔다.
침에 녹아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 것은, 애초에 없었던 것과 똑같다.
*
오늘 밤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 내 안에 두 사람을 두는 법.
둘,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드는 법.
이 �� 개만 있으면, 사람은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다.
아주 멀리.
@oppoconus24@Mill_0 그시절 일본인들이 힘이 넘쳐서 제국�� 황군이 되어 아시아 전역을 헤집고 다녔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힘이 없어서 소수의 미친 인간들이 시키는대로 쓸려간 슬픈 결과물이 아니었을까요. 지금의 일본인들도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고 좀더 힘을 모아서 민주주의를 키워가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쓰는 성인용 기저귀를 매월 사야 하는데, 쿠팡은 다른데보다 수십프로 더 싸다. 공산품이 이렇게 가격차이가 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정도면 진심으로 쿠팡을 써야하나 갈등이 된다. 저 값이 바로 돌아가신 노동자들의 목숨값이겠거니,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깟 만얼마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채식한다 하면 꼭 '그러면 소돼지 말고 풀은 안불쌍하고 죽여도 괜찮냐' 하는 이들이 있었다. 꽤 논리적인 척하는 반문이었으나, 사실 난 아무것도 않겠다는 말일 뿐이었다. 뭐라도 덜 죽이고 싶다는 실천 앞에서, 냉소하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채 끝없이 '그러면 ㅇㅇ은?' 만 날리던. 늘 똑같다.
이것은 철학을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철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입문하기 좋은 도서이고, 이런 책들을 읽고 철학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고 나서 철학사 책이나 주제나 인물 중심의 책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E.g.
제 분야인 서양고대철학은
<서양고대철학> 1, 2권을 추천드립니다.
분석철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