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잃어가며
타인의 마음을 채우지 않게 하소서.
이미 지나가버린 어제의 기억에 웅크려
더는 소리 죽여 홀로 울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참 애썼다,
스스로 건넨 그 한마디에도
충분히 다정한 밤을 맞이하게 하소서.
오늘 삼켜낸 울음이 내일의 당신을
찌르는 가시가 되지 않게 하소서.
무엇보다 내일의 당신이,
오늘 한없이 서툴고 작아졌던 당신을
기꺼이 끌어안고 결코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모든 소란한 계절 위로
마침내 무해한 평안이 내려���게 하소서.
부디 내내 온전하소서,
당신의 모든 밤 모든 날이
더는 아프지 않고 무사하기를,
기어코 당신의 세계에
다정한 봄이 찾아오기를,
제��� 그렇게 되게 하소서.
<스스로 낮아지는 일에 대하여>
*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스스로 낮아지기로 결심한 사람을 본 적 있을 겁니다.
굴복이 아니라, 선택으로.
패배가 아니라, 의지로.
자신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약한 사람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무너지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다르죠.
스스로를 내어주려면 먼저 자신의 가장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원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장자리를 모른 채 낮아지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표류죠.
자신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온전히 내어줄 수 있다면,
낮아짐은 약함과 얼마나 다른 말일까요.
그렇다면 이 선택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 무너짐을 누군가에게 기꺼이 보여주는 것.
그러면서도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온전히 떠날 수 있는 것처럼.
그 전제가 살아있는 관계인지,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 있나요.
지금 나는 원해서 여기 있는가.
두려워서 머무는 것은 아닌가.
이 관계가 나를 더 작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물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낮아진 자리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낮아지기로 선택한 사람은
상대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어요.
내가 무너질 때 그것을 이용하지 말 것.
내가 취약할 때 나를 더 작게 보지 말 것.
내어주는 것은 넘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계를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낮아짐은 존엄을 가집니다.
그 경계를 말하는 것이 이 관계를 깨뜨린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정말 그 관계는 괜찮은 걸까요.
결국 묻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당신이 가장 낮아지는 순간,
그 자리를 함부로 다루지 않을 사람 앞에 있나요.
그런 사람 앞에서만
우리는 두려움 없이 무너질 수 있고,
그렇게 무너진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낮아지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소유욕 강한 것보다
점점 소유욕 생기는 거 보이는 게
진짜 마싯서 ദ്ദി *´꒳`*)⁾⁾
약간 상대도 점점 감기면서
더더욱 ���력적이고 강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게 좋아 (*๓´꒳`๓*)
섬뜩한 애정표현도 조와
죽여버린다, 가둬버린다 그런 거 크크
☆ 관계 정립 이후에 자격 있을 때 한정 ☆
결이 맞는다는 것 - 가장 낮아질 때 나를 가장 높이 여겨주는 사람
*지���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펫’이라는 정체성은 우리를 ‘수용’이라는 틀에 쉽게 가두려 합니다.
받아들이고, 따르고, 내어주는 존재로.
그러나 오너-펫 관계가 단순히 펫의 수동적 역할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이 관계의 본질을 절반만 이해한 것입니다.
오너와 펫 사이에서 가장 먼저 중요한 마음가짐은
‘내어줌’과 ‘잃음’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펫에게 복종은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온전히 내어줄 수 있죠.
펫이 자신의 욕구와 경계를 제대로 모른 채 복종한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자신을 잃어가며 오너에게 맞추는 것을
‘좋은 펫’이라 착각하는 순간,
관계는 서서히 서로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오너에게도 중요한 것은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는 겁니���.
오너-펫 관계의 권력은 오너가 펫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펫이 오너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형태입니다.
이 작은 차이가 관계 전체를 결정해요.
위임은 언제든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 전제가 무너지는 순간, D/S는 관계가 아니라 착취가 됩니다.
그래서 오너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 기술이 아니라,
그 권한을 책임감 있게 다룰 수 있는 성숙함입니다.
펫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복종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오너와 펫 사이에 ‘결이 맞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향이 맞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펫의 복종 방식을 정확히 원하는 오너를 만나는 것도 충분하지 않아요.
진짜 결이 맞는다는 것은,
펫이 가장 낮아지고 약해지는 순간에도,
오너가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펫이 무너질 때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주고 지켜줄 것이라는 깊은 신뢰입니다.
펫은 관계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 취약함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오너의 역할이며, 오너는 그 취��함을 보호할 책임을 가집니다.
아무리 능숙한 오너라도 펫의 취약함을 무기로 삼는다면,
그 능숙함은 지배가 아니라 조작이 됩니다.
이처럼 결이 맞는 오너-펫 인연은
갈등이 생겼을 때 펫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가,
세이프워드를 사용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플레이가 끝난 뒤 펫을 어떻게 돌보는가 같은
작은 순간들 속에서 천천히 증명됩니다.
결국 오너-펫 관계를 한다는 것은,
둘 다 강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펫은 자신을 알고 경계를 지키며 잘못된 관계에서 떠날 용기를 가져야 하고,
오너는 권력을 섬세하게 다루며 상대를 보호할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복종은 약함이 아니며, 지배 역시 폭력이 아닙니다.
서로를 제대로 존중하고 분별할 때,
비로소 이 관계는 의미를 가집니다.
결이 맞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낮아질 때에도,
나를 가장 높이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 오너 앞에서만 펫은
두려움 없이 온전히 무너질 수 있고,
그렇게 무너진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어요.
진짜 결이 맞는 관계는
서로를 더 강하게 만드는 관계입니다.
복종과 지배가 아닌,
깊은 신뢰와 존중 속에서 피어나는 관계.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펫��로 사는 것은 더 이상 약함이 아니라
가장 용감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요?
# 대디 & 리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가치관과 성향관에 따른 글입니다.
글을 서술하기에 앞서, 저는 대디 성향이 있긴 하지만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제가 다뤄도 되는 것이 맞을지 상당히 고민이 많이 됐지만
너무도 많은 분들이 제가 생각하는 대디 & 리틀 성향에 대한 고찰과
현재 에셈판에서의 대디 &리틀의 입지를 적어주길 원하시기에 한번 써보려 합니다.
최근 에셈판의 다양한 글들을 조용히 지켜보다 보면 '대디'와 '리틀'이라는 단어가 특히나 로망트로서 너무나 손쉽게 소비되는 풍경을 유독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귀여운 애교를 주고받는 말장난이나, 일시적인 도파민을 채우기 위한 단편적인 역할극 정도로 전락해버린 듯한 모습들.
그 가벼움의 궤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에 형용하기 어려운 깊은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남곤 합니다.
D/L 관계를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은 흔히 이 역��을 무조건적인 다정함이나 아이처럼 예뻐해 주는 것 정도로만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관계의 내밀한 틈새를 들여다보면, 이 관계성을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BDSM 중 "D", Discipline 즉 훈육입니다.
훈육이 배제된 대디 리틀은 그저 허울 좋은 호칭이 오가는 다정한 연인 관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관계가 BDSM적인 엄격한 역학이자, 동시에 깊은 정서적 치유의 영역으로 기능할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훈육이 가진 무게감 때문입니다.
이 관계의 본질은 그렇게 필요할 때만 가볍게 쥐었다가 놓을 수 있는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유약한 정서적 결핍을 내 양어깨로 온전히 받아내겠다는 어쩌면 오만하면서도 압도적인 책임감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늘 사회 구성원 중 하��인 성인으로서의 완벽함과 결점 없는 통제를 요구합니다.
끊임없이 이성적이어야 하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며 삶의 무게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로감 속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지치기 마련입니다.
D/L(Daddy & Little) 관계의 핵심은 바로 그 무거운 외투를 잠시 벗어 던지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조건 없는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상대의 취약함을 마주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대디가 리틀에게 부여하는 규칙들은 단순한 억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친 풍파로부터 리틀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울타리의 경계선입니다.
리틀이 규칙을 어겼을 때 단호하게 행해지는 훈육은 대디가 리틀의 일상과 행동을 방치하지 않고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가장 적극적인 관심의 증거가 됩니다.
만약 리틀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거나 제멋대로 행동해도 대디가 그저 허허 웃으며 넘어가 준다면 리틀은 역설적으로 그 관계 안에서 '방치당한다'는 은연중의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못을 명확히 짚어내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묻는 과정이 있어야만 리틀은 비로소 대디가 쳐놓은 울타리의 단단함을 실감하며 그 안에서 온전한 안정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정감이 이어져야만 리틀 성향자분들이 흔히 말하는 리틀 스페이스, 심리적 퇴행을 겪게 되고 안정감 속에서 따르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리틀 성향자가 아동기적 상태로 회귀하는 심리적 퇴행을 겪을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어리광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런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아도, 무능력하고 약할지라도 "존재 자체로 온전히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가닿기 힘든 원초적인 안도감입니다.
마스터/오너/대디 라는 성향이 '도미넌트'라는 계열을 가장 짙게 나타내는 이유는 결국에는 정신적인 지배 방식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D/L 관계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조건 없는 사랑과 보호'에 맞닿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완벽하게 충족되지 못했던 의존의 욕구, 혹은 성인이 되어 마주한 압도적인 책임감으로부터의 도피처로서 리틀은 리틀 스페이스라는 심리적 퇴행 상태를 찾습니��.
이는 유아기적 약점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안전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고 치유받으려는 지극히 건강하고 방어적인 심리 기제입니다.
대디 성향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올바르게 인도하며,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상대방이 평온을 찾는 모습을 볼 때 깊은 정서적 충족감을 느낍니다.
이들의 관계는 겉보기에는 한쪽이 지배하고 한쪽이 종속되는 비대칭적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호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보호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완벽하게 맞물린 가장 이상적인 상호보완적 균형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성을 가진 성향을 단순히 성적 유희로 소모되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대디이~" "애기~"하면서 이렇게 해서 섹스하고 저렇게 해서 섹스하고 하는 게 어떻게 D/L 관계인가요?
이건 대디 성향자와 리틀 성향자를 욕보이는 행위랑 다른 게 없습니다.
마스터만큼 찾기 어려운 것이 대디 성향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D/L의 관계성을 단순히 성적 유희, 단편적인 역할극으로 사용되는 것이 안타깝���만 합니다.
특히나 상대적으로 어린 이성을 꼬시는 용도로 사용하는 분들이 정말 너~~~~~~무 많습니다.
이전에도 썼다시피 멀쩡한 성인은 절대 미성년자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성적주제의 에셈판에서는 더더욱이요.
이 관계성이 지닌 무게감과 치유의 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저 자극적인 역할극 템플��으로 이를 소모할 때
오랜 시간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단단한 신뢰를 쌓아온 성향자들의 진정성은 빛을 잃고 맙니다.
D/L의 관계는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조건 없는 수용이자 상대방의 세계를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위대한 헌신입니다.
그 안의 서사를 채우는 훈육은 서로의 영혼을 가장 안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괜히 BDSM의 서구권에서 Daddy가 '주인'에 동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깊고 밀도 높은 관계성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유희로 닳아 없어지지 않기를
그리하여 이러한 책임을 이룬 관계가 그 진정한 가치대로 존중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펫성향 참고서 ]
* 개인적인 제 생각이에요
펫은요 주인님만의 강아지가 되고 싶어해요. 사람인데도 이 자아를 버리고 주인님 앞에 기어다니며 애교부리는 그런 애완견이요. 모든 선택권을 당신께 위임하고 당신의 지배와 통제 아래 살아가는 노예가 될수도, 힘든 일 있을때면 눈물을 머금고 달려가 안기는 애기가 될수도 있어요. 물론 밖에서는 절대 그런 이미지가 아닐거에요. 당신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이죠.
그래서 나를 지배하는 당신의 ��할이 중요한거에요. 학대받는 불쌍한 강아지가 될수도 아니면 주인님 앞에서만 발정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히 걸어가는 그런 강아지가 될수도 있어요.
펫은 당신께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노력하는 타입이에요. 스스로 이쁨받기 위해서 연구하고 막 미친듯이 애써요. 그러니 펫이 괜히 당신을 바라보며 웃어보이면 "왜?"라고 묻지 말고 괜히 턱한번 머리한번 쓰다듬어주세요.
펫은 외로움이 엄청 심해요. 그리고 당신이 관심이 없어보일 때면 미쳐요 내가 그렇게 쓸모없어졌나 싶고 내가 그렇게 안예뻐보이나 싶어요. 그러니 하루에 한번 사랑한다 해줘야 해야해요.
펫은 본인 만족보다 주인인 당신의 만족이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매번 뭐하고 싶냐고 묻지 말고 이끌어주세요. 당신이 하고싶은게 곧 제가 하고 싶은거에요.
사랑한다 해줘야하고 안아줘야해요. 슬플땐 다독여주고 잘못됐을땐 목줄 잡아끌어 뺨때리며 정신리게 해줘야하구요. 당신의 완벽한 오나홀로 자리할 수 있게 교육해줘야해요. 그리고..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게 가꾸고 길들여줘야 해요..
이런데도 펫을 들이고 싶어요?
쉽게 입양을 결정하면 안돼요. 파양은 펫에게 목숨걸린 일이거든요.
#에세머 #펫
에세머와 바닐라의 차이는 말하자면 많지만 제일 중요한 건 관계의 방향이 수직이냐 수평이냐 인 것 같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복종과 교육의 자세는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 수직관계에서는 서로가 원하는 바가 어느정도 달라야 서로 만족하고, 수평관계에서는 서로 원하는 바가 같아야 만족한다.
# 상납
어디까지나 주관��인 가치관과 성향관에 따른 글입니다.
개인의 성적 취향이라는 주제의 성적인 공간이라지만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를 하나의 킹크(Kink, 성적 취향)로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번에 말하고 싶은 말은 '상납'이라는 명목하에 불특정 다수의 사진과 영상을 요구하는 이들의 당당함
그리고 그것을 그저 취향 중 하나로 방관하는 사람들의 무감각함과 뻔뻔함 때문입니다.
본래 SM에서의 지배와 피지배는 가장 취약한 내면을 안전하게 꺼내어 놓기 위한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단단한 신뢰를 쌓아온 나의 서브와 합의된 플레이의 연장선으로 시각적인 기록을 공유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두 사람만�� 관계이자 영역이고 책임입니다.
그 안에는 서로의 선을 존중하겠다는 책임감과 그 기록을 끝까지 보호하거나 파기하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정서적 유대도 관계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 너무나 당당하게 신체 사진과 영상을 요구하는 이들의 심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 지배든 심리적 지배든 지배를 띄는 성향은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군림하며 성적 결과물을 무상으로 갈취할 수 있는 암행어사 마패가 아닙니다.
아무런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메인트에 성향표 하나 걸어두고 그저 지배자라는 타이틀 하나로 타인의 가장 은밀한 약점을 쥐려는 행동은 그저 비겁하고 영악한 착취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것을 BDSM적인 킹크(Kink, 성적 취향)로 받아들이고 묵인해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에 ���주했을 때
우리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는 참혹한 기억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과거 에셈판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시대에 에셈판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이라면 'N번방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싹을 틔우고 전개되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끔찍한 범죄의 시작 역시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적인 목적으로 오고 가던 작은 사진과 영상들이 그 시초였습니다.
그렇게 받아낸 기록물들을 빌미로 약점을 잡고, 개인정보를 뜯어내고, 끝내 거대한 범죄 네트워크를 구축해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던 것이 바로 그 사건의 본질입니다.
에셈판 역시 그 당시 교류계를 했던 분들은 대부분 피해 갔지만 다른 결로 계정을 운영하시는 분 중 분명 피해를 본 사람들 또한 다수입니다.
그 끔찍한 역사를 보고도 여전히 상납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과 영상을 받기를 바라고 그것을 타임라인에 당당히 게시하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최소한의 사회적 경각심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디지털 공간에서 사진과 영상은 한 번 전송되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 ���제되고 악용될지 장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무기가 됩니다.
흔히 트친소, 겹친소 느낌으로 단순히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가 도용을 당해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무서운지 충분히 아실 거라 ��습니다.
타인의 취약함과 순진함을 이용해 언제든 칼날로 변할 수 있는 기록물을 손에 쥐려는 행위는
킹크라는 말로 포장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의 모방이자 전조 증상입니다.
가장 본능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공간이기에 오히려 현실보다 더 엄격한 도덕적 마지노선과 경계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에셈판은 성향이라는 면죄부 뒤에 숨어 누군가의 안전을 너무나 값싸게 소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향이라는 단어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과 안전이 담보될 때만 허락되는 품격 있는 수식어라고 생각합니다.
왕관의 무게는 감당하기 싫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과
과거의 참상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무감각하게 상납과 같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되면 절대 건강한 커뮤니티로서 자리 잡지 못합니다.
에셈판은 누군가의 영악한 디지털 갑질과 착취를 정당화해 주는 치외법권 지대가 아닙니다.
저에게 디엠으로 상납과 비슷하게 사진을 보냈다가 쓴소리 들어보신 분들 중에서도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분명 있으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제발 본인의 안전을 가장 먼저 신경 써주세요.
에셈판은 단순히 욕구를 위해 인생을 낭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향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그 안일하고 위험천만한 요구들을 단순히 방관하기보다는 경각심을 가져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주인이 슬레이브·서번트에게 교육, 트레이닝, 교정 등을 하는 것�� 대해 휘어지는 법, 낮추는 법, 깎아내는 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란 보편적 인식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주인이 교육, 트레이닝, 교정 등을 하는 건 오히려 올곧게 가는 법, 높이는 법, 지키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