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여성이 공부하러 가다 변태성욕자에 의해 살해 당했다. 꽃다운 나이. 소중한 딸을 잃은 부모와 가족들. 경찰은 우발적 살인으로 수사를 조작했지만 검찰이 보완수사를 통해 계획 살인 혐의를 찾아냈다. 천인공노 할 조작 은폐 사건을 접한 국민들 분노를 <핑계>라고 하는 여성 정치인.
평양을 향해선 ‘프리패스’, 국민을 향해선 ‘입틀막’
"에이,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딨습니까? 우리 국민 수준이 얼마나 높은데 그런 거에 속겠어요."
좌파 진영이 국가 안보의 빗장을 풀어젖힐 때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이 해맑고 낭만적인 세계관이 마침내 통일부의 공식 정책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정부가 우리 국민이 친북 단체인 조총련 인사들을 접촉할 때 부과되던 사전 신고 의무를 아예 폐지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무단 접촉으로 과태료를 물렸던 사안을, 이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날 수 있게 족쇄를 풀어주겠단다. 북한의 노선을 추종하는 단체와의 교류마저 '국민의 자유'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보장해주겠다는 눈물겨운 톨레랑스다.
국가 안보를 무장해제하는 이들의 행보를 팩트로 병치해보면 가히 엽기적인 수준이다. 방위 출신에 탈영 의혹까지 꼬리표로 달린 인물을 국방부 장관석에 앉혀놓질 않나, 휴전선 철책이 쑥 밀려 내려와도 태평하질 않나. 이제는 적성국의 전위대 역할을 해온 조총련과의 만남마저 "자유로운 남북 교류"라는 포장지를 씌워 대문을 활짝 열어주려 한다.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종북'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 조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적 상식이건만, 이들은 아예 보란 듯이 안보의 빗장을 뜯어버리며 폭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참으로 기괴하고 서늘한 블랙코미디와 마주하게 된다. 조총련을 만나는 것조차 국민의 자유라며 한없이 관대한 이 '빛의 정부'가, 도대체 왜 자국 국민들의 일상적인 입과 귀 앞에서는 그토록 잔혹하고 옹졸한 사상 통제관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북한 공작 노선을 따르는 단체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은 국민 수준이 높아 안 속으니 괜찮단다. 그런데 십 대 소녀가 무심코 내뱉은 "무섭노"라는 사투리 한마디에는 체제가 전복될 듯 거품을 물며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고등학생들이 뱉어낸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응원 구호에는 5.18을 모독했다며 야구 생명을 인질로 잡고 묘역에 끌고 가 사상 개조를 강요한다. 힙합 래퍼의 가사가 고인을 비꼬았다는 이유로 음원 유통망을 긴급 차단하는 법안을 발의하고, 입틀막법을 동원해 온라인 게시글에 5배의 징벌적 배상을 매기겠다며 시민의 혀끝을 꿰매버린다.
도대체 이 정권이 바라보는 국민의 지적 수준은 어느 장단에 맞춰져 있는 것인가. 조총련의 주체사상 선동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만큼 위대하고 현명한 국민이, 래퍼의 랩 가사나 동네 카페의 커피 브랜드 호명, 십 대 소녀의 사투리 종결어미 앞에서는 뇌가 순백색으로 세탁되어 선동당하는 나약한 개돼지라도 된다는 말인가.
모순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적국을 이롭게 하는 세력과의 교류는 '개인의 자유'로 격상시키고, 자국민이 일상에서 내뱉는 자연스러운 언어와 문화는 '유해 매체'이자 '엄벌의 대상'으로 짓밟는다. 밖으로는 한없이 문을 열어젖히면서 안으로는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거대한 무균실을 만들겠다는 이 극단적인 조현병적 통치.
노동신문을 볼 자유는 세금까지 써서 허용하지만, 국민들의 의견은 서로 신고하라는 정부.
적의 이념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국민의 비판과 풍자 앞에서는 잔혹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권력. 우리는 지금 "빨갱이가 어딨냐"며 웃는 얼굴로 안보를 해체하면서, 당신의 이어폰 속 노래와 커뮤니티 게시물은 현미경으로 털어버리겠다는 기상천외한 사이버 수용소의 완성을 목도하고 있다. 평양을 향해서는 '프리패스'를 끊어주고 자국민에게는 '입틀막' 재갈을 물리는 이 찬란한 기만극을 비웃어주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조총련 인사를 만나는 것은 합법이고 사투리를 쓰는 것은 불법이 되는 완벽한 디스토피아에서 숨을 쉬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기백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안기백으로 개명하는 건 어떨까? 안규백 국방부 장관의 그 뻔뻔한 뚝심 하나만큼은 가히 4성 장군을 능가한다.
억울하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병적기록부를 당당하게 대중 앞에 공개하고 오류를 조목조목 짚어내면 된다. 그런데 국방부의 논리는 상식의 척추를 가볍게 부러뜨린다. "40년 전 잘못된 기록을 공개하면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안 깐다"는 것이다. 명백한 허위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정작 그 허위를 증명할 수사 기록과 '구금 30일'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확답하기 어렵다"며 입을 다문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신비를 청와대와 여의도에 이어 용산 국방부 청사에서도 목도하게 될 줄이야. 바야흐로 '슈뢰딩거의 병적기록부'다.
가장 배꼽을 잡게 만드는 대목은 기록 정정의 타이밍이다. 안 장관 본인은 이 기막힌 기록 오류를 무려 2016년에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그 10년의 세월 동안 가만히 있다가, 장관 청문회 때 두들겨 맞고 지금까지 논란을 끌고 왔는가.
여기에 대한 국방부의 답변이 예술이다. "장관 신분으로 정정 청구를 하면 권력을 남용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임기를 마치고 권력이 없는 평민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고치겠다"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거룩하고 투명한 권력 분립의 정신인가. 하지만 이 찬란한 핑계에는 치명적인 논리적 블랙홀이 존재한다. 2016년 오류를 발견했을 당시 그는 국방부 장관이 아니었다. 권력이 없던 지난 8년 동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장관 완장을 차고 의혹이 터져 나오자 그제야 '퇴임 후 정정'이라는 기상천외한 예약 시스템을 가동하는가.
"현역병에게 집에서 밥 한 끼 먹였다가 조사를 좀 받고, 여름방학 때 며칠 더 복무한 게 8개월로 기록됐다"는 그 동화 같은 해명이 사실이라면, 군 행정 시스템은 며칠을 8개월로 부풀리는 시공간의 마술사란 말인가. 국민을 바보로 여기지 않고서야 이런 얄팍한 동문서답을 브리핑이라고 내놓을 수는 없다.
자기 병적 기록부 하나 공개하지 못해 쩔쩔매는 자가, 3군 사관학교를 통합하겠다며 군의 근간을 뒤흔들고 식중독 걸린 예비군에게 썩은 밥을 먹인 국방부의 수장이라는 사실이 작금의 대한민국이 마주한 가장 서늘한 안보 참사다.
종합하면 이거다. "탈영은 명백한 허위다. 하지만 기록은 공개하지 않겠다. 고치는 것도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 우아하고도 오만한 유체이탈 화법 앞에서는 스티브 유조차 무릎을 꿇고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 군의 명예를 진흙탕에 처박으면서도 권력의 단물은 임기 끝까지 빨아먹겠다는 그 대단한 기백에 기립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증거를 감추고 혀끝으로만 쌓아 올린 변명의 제단은, 결국 그 알량한 거짓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장 참혹하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닳고 닳은 어른의 눈에 비친 초원의 집
어린 시절, 빛바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통해 만나던 '초원의 집'은 나에겐 마치 한국의 '전원일기'와 같은 온기의 상징이었다. 척박한 서부의 땅을 일구면서도 이웃과 빵을 나누고, 소박한 식탁 위에서 가족의 사랑과 이웃 간의 연대를 확인하던 그 투박한 풍경들은 국경과 시간을 넘어 마음 한구석을 다정하게 덥혀주었다.
최근 이 명작이 리메이크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재생해 봤다. 원작이 품었던 그 뭉클한 인간애를 과연 현대의 문법으로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기대와는 다르게 한편으로, 내 안에서 뜻밖의 씁쓸한 이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백인 개척자 가족이 인디언 원주민이나 흑인 이웃과 아무런 편견 없이 동등하게 어울려 웃음 짓고 식사를 나누는 장면. 어린 시절에는 그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인류애의 모습으로 가슴 벅차게 받아들였던 그 풍경이, 이제는 왠지 현실성 없는 억지스러운 판타지나 강박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피부색과 출신이 달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 어울려 사는 그 순수한 풍경을 보며 감동하기는커녕, 작위적인 의도나 이념적 메시지부터 의심하려 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웃과 조건 없이 연대하는 아름다운 서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내 마음은 언제부터 이토록 닳고 닳아버린 것일까.
아마도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분법적 갈등과 혐오에 찌들어 살아왔다. 특히 스스로를 도덕적 파수꾼이라 여기는 정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세상을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으로 쪼개고 분열시키는 데 익숙해져 왔다. 남자와 여자, 세대와 세대, 이젠 심지어 사투리나 일상적인 농담 하나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낙인을 찍고 갈라치는 시대. 이질적인 존재들이 서로의 다름을 품어주며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낭만은 그저 동화같은 판타지가 되버렸다.
매일같이 뉴스에서 누군가를 혐오하고, 좌표를 찍어 매장하고, 이견을 인정하지 못해 징벌적 법안으로 입을 틀어막으려는 살벌한 광장. 갈등을 조장해야만 권력의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정치꾼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동안,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평등한 어울림은 이젠 낯설다.
내가 '초원의 집' 속 평화로운 공존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고 판타지란 생각에 휩싸이게 된 것은, 나 스스로가 다름을 포용할 능력을 철저히 거세당했기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마음이 가난해진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더 이상 그 이면의 순수함을 온전히 믿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종과 이념을 넘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뜯는 그 평범한 온기가 우리에게 이토록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다가온다면,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이 사회의 토양은 대체 얼마나 메마르고 피폐해진 것인가.
어릴 적 낡은 텔레비전 앞에서 느꼈던 그 다정한 인간애를 영영 잃어버린 채 날 선 의심과 편견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얄팍한 정치적 계산과 혐오의 렌즈를 벗어던지고 서로를 그저 한 명의 이웃으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너른 초원을, 우리는 아니, 나는 다시 마음속에 일구어낼 수 있을지 무겁게 되묻게 된다.
Bill Conti - "Going The Distance" & "The Final Bell" https://t.co/FqQIkhmV6f - @YouTube
지리산 그 산에 가려 일찍들어와 잠깐 보았다.
록키시리즈중 1. 은 단연코 👍
권투, 사랑의 영화도 아니다. 결과는 상관없는 자신을 극복했다는 그런. .
마지막 15라운드 울려퍼지는 음악이란
" 대전지검 홍성지청은 전 여자친구 C(43) 씨와 교제하던 B(43) 씨를 살해한 A(52) 씨를 경찰이 적용한 살인 혐의 외에 스토킹처벌법 위반과 살인예비 혐의를 추가해 구속 기소했다고 9일 밝혔다. "
날을 바짝 세운 72cm짜리 도검을 손수 제작해 사람을 여러 차례 찔렀다. 누가 보아도 소름 끼치도록 집요한 계획범죄의 현장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참으로 태평하고 자비로운 결론을 내렸다. "우발적 살인이네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찰나의 우발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대장장이처럼 철을 두드리고 72cm짜리 칼을 벼려낸단 말인가. 상식의 척추를 가볍게 부러뜨리는 이 기적의 수사력 앞에서는 그저 "내가 뭘 본거지?"라는 실소만 터져 나온다.
이 황당한 '우발적 살인' 코미디를 '계획적 살인과 스토킹'이라는 명백한 진실로 되돌려 놓은 것은 이 번에도 역시 검찰의 보완 수사였다. 1년 치 통화 기록과 기지국을 뒤져 공기총까지 사려 했던 범인의 진짜 낯짝을 밝혀냈다. 광주 여고생 사건에서 끈끈한 유착과 증거 인멸로 가해자의 아버지를 비호하던 경찰의 민낯이 드러난 지 불과 며칠 만에, 또다시 견제받지 않는 경찰 수사의 맹점이 적나라하게 폭로된 셈이다.
그런데 이 참담한 팩트 앞에서도 민주당의 멘탈은 강철처럼 굳건하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일선 경찰의 부실 수사를 두 눈으로 보고도, 기어코 검찰의 보완 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겠다는 당론을 뻔뻔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검찰이 직접 진실을 캐지 말고, 경찰에게 '다시 수사해달라'고 요구만 하라는 것이다.
72cm 칼을 보고도 우발적 범행이라 퉁치는 조직에게, 블랙박스를 눈앞에서 지워버리는 조직에게 사건을 다시 돌려보내 조사하라는 이 해맑은 궤변. 고양이에게 생선을 훔쳐 갔는지 꼼꼼히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말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이들이 이토록 상식을 걷어차면서까지 국가 사법 시스템의 눈을 가리려 발악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서민들이 부실 수사로 피눈물을 흘리든, 흉악범이 거리를 활보하든 그것은 애당초 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 같다. 오직 자신들의 얄팍한 정치적 방탄, 즉 권력형 비리를 파헤칠 검찰의 메스를 영구히 압수하는 진영의 카르텔만 무균실로 지킬 수만 있다면, 평범한 시민들이 억울하게 죽어 나가는 사법의 사각지대쯤은 기꺼이 제단 위에 올려 바치겠다는 지독한 이기주의다.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던 마지막 비상벨마저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 연장을 위해 뜯어버리려는 좌파의 폭주.
일년 남짓한 이재명 정권동안 검찰의 보완수사가 밝혀낸 억울한 죽음이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날만큼 수도 없는데, 아직도 외면하며 보완수사 폐지를 고집하는 민주당.
이 기막힌 사법 방해를 '개혁'이라 포장하며 시민의 안전을 계속해서 정치 공학의 땔감으로 던져 넣는다면 뼈저리게 각오해야 할 것이다. 힘없는 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은폐하도록 방조한 그 피 묻은 제도의 청구서가 어영부영 사라질 거라 기대하지는 말자.
[광기의 사회, 배재고와 광주일고가 던진 ‘실버 라이닝’]
대한민국이 ‘진영 중독’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질식해가고 있다. 상식과 이성은 실종됐고, 오직 편 가르기와 증오의 언어만 춤을 춘다.
오죽하면 특정 지역 사투리의 평범한 접미사까지 탈탈 털어 ‘혐오의 번역기’를 돌리는 막장 관종들이 판을 치겠는가. 자칭 진영을 수호한다는 자들이 저지르는 이 가당치 않은 ‘자해 공갈적 3차 가해’ 앞에 우리 사회의 지성은 완전히 마비됐다.
오만과 광기의 질주는 권력의 심장부에서 절정을 이룬다. 검찰과 사법체계를 시녀로 만들더니, 이제는 수사권마저 완벽하게 틀어쥐고 ‘권력 면죄부 백화점’을 차렸다.
국민적 공분을 산 ‘장윤기 사건’의 경찰의 증거인멸과 은폐가 드러났음에도 보완수사권을 당권 노름의 칩으로 팔아치웠다.
파렴치한 범죄 행각으로 아군인 민주당에서조차 손가락질받던 김병기 전 원내대표 수사는 1년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이제 대한민국에는 ‘친윤·친명 무죄, 비선 유죄’라는 기괴한 사법 신조어가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표현의 자유마저 압수수색 하겠다는 이른바 ‘국민 입틀막법’(정보통신망법)의 공포는 온라인 공간에 군화발을 들이미는 ‘사이버 계엄령’의 서막이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고, 정치는 조선 시대 사색당파 싸움을 무안하게 할 정도다. 반도체 착시효과 뒤에 숨은 물가·환율 폭등, 청년들의 취업·주거 대란에는 눈을 감았다. 코스피 상승을 정권의 치적으로 포장하더니, 공교롭게도 이른바 반도체 메가프로젝트 발표와 항께 정작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따리를 싸는 ‘엑소더스’ 현상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집안 살림 거덜 나는데 옆집 잔치 떡고물로 생색내는 격’이다.
정부 여당은 ‘파묘 논쟁’을 일삼으며 이전투구에 여념이 없고, 대통령은 역대 누구보다 노골적으로 여당 전당대회에 숟가락을 얹으며 권력 중독의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기가 막힌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대통령의 ‘선택적 만기친람’과 수박 겉핥기식 현실 인식이다. ‘셀프 면죄부’라는 비판이 들끓어도 여당 인사들을 향한 ‘공소취소’ 고집은 요지부동 콘크리트다.
왕조 시대의 왕도 눈치를 보았던 사법 체계를 사유화하려는 오만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광기의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의 한 줄기 빛,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을 보았다.
최근 고교 야구 판을 뒤흔든 ‘배재고 사태’를 보라. 철없는 학생들의 잘못에 대해 배재고가 진정 어린 사과를 건네자, 상처의 당사자였던 광주일고 야구부와 교장 선생님이 오히려 “배재고 징계를 선처해달라”고 공개 요청했다.그동안 광주항쟁을 배타적이고 독점화 해왔던 기존의 일부 꼰대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진영과 증오의 독극물에 중독된 정치권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진짜 어른들의 연대’이자 ‘화합의 홈런’이다. 퇴행적 진영주의에 찌든 우리 사회에 이 썩어빠진 진영주의를 불살라버릴 거룩한 불씨가 날아든 것이다.
우리 사회와 정치가 이 고등학생들과 교장 선생님의 품격의 반의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
배재고와 광주일고가 보여준 이 화합의 불씨를 결코 꺼뜨리지 말아야 힌다. 이 연대와 관용의 정신을 광장으로 끌고 나와, 권력의 미친 질주를 제어하고 민주주의와 민생을 회복하는 브레이크로 삼아야한다.
이 작은 실버 라이닝이 대한민국을 뒤덮은 광기의 먹구름을 걷어내는 거대한 태풍이 되도록, 국민의 상식과 집단지성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광기의 독주 #입틀막법 #배재고_광주일고 #실버라이닝 #상식의승리
문재인이 유력대선후보였던 2017년부터 이재명 지지 그룹에서 '곰'이라고 문재인을 지칭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처럼 추락하는 모습을 글자가 뒤집어진 형상으로 비꼰거였다. 이런 작태는 윤석열 정권때도 이어져 이젠 윤석열 반대자들이 '굥' 이라고 부르더라. 일베랑 니들이랑 다를 게 뭐냐?
미리 얘기해두지만 앞으로의 얘기는 모두 나만의 양심에 따른 나 혼자만의 판단일 뿐이다.
대한민국 좌파 진영의 빈곤한 세계관을 지탱하는 8할은 스크린 속 영화다. 그들은 극장에 앉아 팝콘을 씹으며 영화 <1987>을 보고 민주주의를 배웠노라 눈시울을 붉힌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군사정권의 기막힌 변명에 분노하며, 자신들이 그 시대의 숭고한 민주 투사라도 된 양 비대한 도덕적 자아를 키워왔다.
그러나 이 감성적인 좌파들이 짐짓 모른 척하는 건조한 팩트가 있다.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의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경찰의 사건 은폐에 맞서 부검을 밀어붙였던 '수사 지휘권'을 가진 '검찰'과 보도 지침을 어겨가며 진실을 활자화한 자유로운 '언론'이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하수인이기를 거부한 수사기관과 펜을 꺾지 않은 기자의 용기가 교차하며 만들어낸 기적이 바로 1987년의 시발이었다.
이제 시곗바늘을 2026년 오늘로 돌려보자. 영화를 보며 독재를 혐오한다던 자들이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한 짓은 무엇인가. 거악을 수사할 검찰의 손발을 묶어 해체가 결정 되었고, 입틀막법을 앞세워 허위 조작 정보에 5배의 징벌적 배상을 매겨 언론과 시민의 혀끝을 꿰매버렸다. 감시자는 눈이 멀었고, 고발자는 입이 막혔다.
앞으로 권력의 밀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탁 치니 억' 하고 죽어도 우리는 그 진실을 알 길이 사라진거다. 수사를 지휘할 기관은 조만간 문을 닫고, 의혹을 제기할 언론은 파산의 공포에 짓눌려 침묵할 테니까. 1987에 환호하던 세력이 기어이 권력의 만행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는 조지 오웰의 '1984'의 절대 무균실을 완성해 낸 것이다.
더욱 소름 돋는 것은 이 완벽한 억압의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저들이 내뱉은 궤변이다. 시민의 입을 막는 이 폭거를 두고 저들은 "검열이 아니라 민주적 통제"라며 수줍게 웃는다. 여기서 세계사적 기시감이 등골을 스친다. 억압에 '민주'라는 포장지를 덧씌우는 이 기막힌 언어 도용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공산권 전체주의 국가들의 전매특허이기 때문이다.
세계 지도를 건조하게 살펴보자. 미합중국, 프랑스, 영국, 그리고 대한민국. 지구상에 존재하는 진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그 어느 곳도 자신의 체제나 공식 국가명 앞에 구태여 '민주(Democratic)'라는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공기처럼 호흡되는 사회에서는 굳이 그것을 활자로 증명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름표에 강박적으로 '민주'를 새겨 넣는 곳은 어디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구 동독인 독일민주공화국, 그리고 킬링필드의 대학살을 자행했던 폴 포트의 민주 캄푸치아까지. 오직 공산주의 독재 국가들만이 '인민 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라는 화려한 네이밍에 집착했다. 개고기를 파는 푸줏간일수록 간판에는 '최상급 소고기'라고 적어두어야 하는 이치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적 통제'의 본령은 국가가 허락한 팩트 외에는 모두 반동으로 규정해버리는 가장 폭력적인 숙청의 다른 이름이었다.
영화로 얄팍하게 민주주의를 배운 자들이 권력을 잡더니,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검열 논리를 21세기 대한민국에 부활시켰다. 1987년을 소비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던 자들이, 정작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된 1984의 빅브라더 체제를 스스로 구축하고 있는 이 찬란한 역설 앞에서는 분노를 넘어 순도 높은 역겨움이 치밀어 오른다.
어느새 '민주'라는 단어는 저들의 모든 야만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만능 면죄부로 전락했다. 하긴, 억압을 낭만으로 포장하는 그 기만적 본질을 생각하면 지금의 민주당에 이보다 더 완벽하게 어울리는 '민주'도 없을 것이다.
시민의 입을 꿰매는 몽둥이에 '민주'라는 화려한 이름표를 붙인다고 해서, 그 타격감이 솜방망이처럼 부드러워질 리 만무하다. 저들은 가짜 뉴스를 척결하겠다며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지만, 진실을 틀어막아 쌓아 올린 그 거대한 모래성이 과연 누구의 발밑부터 먼저 붕괴시킬지는 머지않아 증명될 것이다.
"쫄지마 ㅅㅂ"를 외치던 가짜 선지자의 선동에 취해 맹목적인 권력을 쥐여준 대가가, 결국 '민주적 통제'라는 합법의 탈을 쓴 채 당신의 입술이 꿰매지는 촌극이라니. 이토록 뼈아프고 잔혹한 블랙코미디가 역사상 또 있었던가.
포장지 외에는 내세울 알맹이조차 없는 이 지독한 언어의 타락을 단호하게 비웃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저들이 허락한 칭송가만 읊조리며 아주 '민주적으로' 질식해갈 것이다.
권력이 제멋대로 재단하는 '가짜'의 기준이 무엇이든 간에, 이 기막힌 야만을 마주한 시민의 공분만큼은 결코 위조할 수 없는 완벽한 진짜다. 기만을 정의로 둔갑시킨 그 비루한 위선 앞에서는, 이제 분노를 넘어 순도 높은 역겨움만이 짙게 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