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 너무 갖고 싶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72명이 실제로 자신의 방을 직접 측량하고 손으로 그린 평면도를 모은 도감이라는데, 디자이너들의 각자 개성이 담긴 손그림 평면도라고 해서 더더욱 좋음. 꼭 번역본이 아니더라도 읽을 맛이 있을 것 같어 😍 어디 구매할 방법 없으려나.
해외에 거주하거나, 하다못해 여행을 좀 다니는 한국인이라면 항상 사진을 요청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관광지에서는 이어폰을 꽂고 지나가는데도 굳이 나를 불러세운다.
처음엔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겨서인가 싶었다. 하지만 수없는 셔터질 끝에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스마트폰을 건네받는 순간, 랜드마크의 지붕 끝 선과 그들의 정수리 위치, 그리고 바닥의 수평을 기가 막히게 조율해 낼 준비된 기술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나는 절대로 '나도 찍어달라'는 요청은 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베푼 그 완벽한 구도의 호의가, 내 폰이 그들의 손을 거치는 순간 처참한 배신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 있게 돌려준 폰 속에는, 아마도 목이 잘린 나와 15도쯤 기울어진 지평선, 그리고 초점이 나간 랜드마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겠지.
이것은 생존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의 근간인 밀 농사는 맨땅에 헤딩이다. 비가 오면 자라고 아니면 만다. 굳이 이웃과 협동할 필요도, 땅을 정밀하게 고를 필요도 없다. 그저 내 밀만 잘 지키면 된다.
이런 환경에서 진화한 그들의 시신경은 분석적 사고에 특화되어 있다. 그들의 뷰파인더는 오직 대상 하나에만 꽂힌다.
"저기 동양인 남자가 서 있는가? 그렇다."
"웃고 있는가? 그렇다."
"찰칵."
그들에게 배경이 기울어지거나 뒤에 있는 건물이 잘리는 건 노이즈일 뿐. 사진의 목적은 '내가 거기 있었다'는 팩트의 기록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조상들이 짓던 벼 농사는 지독한 맥락의 예술이다.
논에 물을 대려면 땅이 완벽한 수평을 이뤄야 한다. 조금이라도 기울어지면 물이 고이지 않아 벼가 말라 죽는다. 옆 논에서 물을 끌어와야 하니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수천 년간 우리 뇌는 전체론적 사고에 절여졌다.
그래서 한국인이 카메라를 드는 순간, 우리 뇌 속의 농사꾼 DNA가 발동한다.
"인물과 배경의 조화는 적절한가? 수평선은 물이 흐르지 않게 평평한가? 발끝은 화면 하단에 맞춰 비율을 확보했는가?"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낀다.
수평이 안 맞는 건, 농사를 망칠 징조이기 때문이므로.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같은 벼 농사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은 왜 우리와 다른가?
먼저, 중국.
동북아 3국 중에 이들이 사진을 제일 못 찍는다.
그들의 사진을 보면 좋게 말해 호탕하다. 디테일한 수평이나 구도는 무시되기 일쑤다.
중장년층 중국인들에게 사진은 일종의 영토 표시.
광활한 대륙에서 14억 인구와 경쟁하며 살아온 그들의 무의식은 외친다.
"내가 여기 왔다! 내가 이 풍경을 점령했다!"
그들의 사진 속에 인물은 풍경을 압도한다. 랜드마크가 잘리든 말든, 내가 화면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전승 기념비처럼 웃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들에게 사진은 자아의 팽창이다.
(물론 젊은 중국인들은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는다. 사진에 미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배경의 수평보다는 인물이 얼마나 빛나느냐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그들은 인물을 구석으로 몰아넣거나, 아예 뒷모습을 찍거나, 풍경 속에 자신을 숨긴다.
그들에게 사진은 민폐의 방지다. 자연과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전체적인 분위기를 깨지 않는 것이 과제다. 그래서 일본인의 사진 속 자아는 풍경의 일부, 혹은 정원석 옆의 이끼처럼 조용히 침전한다.
그들에게 사진은 중국인과 반대로 자아의 축소.
자신이 여기 왔음은 알리고 싶지만, 얼굴 좀 봐달라고 외치는 건 공기의 흐름을 깨는 나르시시즘으로 비친다. 그래서 분위기 속에 녹아든 나를 연출한다.
채도를 낮추고, 약간 뿌옇게 만들고, 노이즈를 섞는다.
쨍하고 완벽한 사진보다는, 빛바랜 듯한 사진이 타인에게 공격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관계를 맺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구도는 묘하게 넓게 잡고, 초점은 약간 나간 듯하게 찍어놓고선 만족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최고의 사진은 '내가 이 공기 속에 얼마나 조용히 스며들었는가'.
일본은 젊은이들도 그렇다.
자, 한국 사람들은?
읽고 있는 독자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중국처럼 팽창하지도, 일본처럼 축소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최적화한다.
우리는 인물이 돋보이되 배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져야 하고, 다리는 길어 보이되 자연스러워야 하며, 색감은 청량하되 유치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세계'를 연출한다.
중국인이 "나는 위대하다"고 외치고, 일본인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속삭일 때.
한국인은 "나는 완벽해야 한다"고 뇌까린다.
좁은 반도, 사실상의 도시국가인 초고밀도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실시간으로 스캔한다.
"사진을 못 찍는다 = 센스가 없다 = 눈치가 없다 = 도태된다."
이 연산이 셔터를 누르는 0.3초 사이에 한국인의 뇌를 지배한다.
중국의 '광장'에서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일본의 '다다미방'에서는 조용히 무릎 꿇은 자가 살아남지만,
한국의 '무대'에서는 가장 세련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결국 앤더슨이 내 사진을 대충 찍은 건 그가 밀 농사꾼이라서고,
왕 씨가 내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찍은 건 그가 광장에 살기 때문이며,
사토 씨가 내 사진을 소심하게 찍은 건 그가 공기를 읽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걸음을 멈추고 모르는 이의 사진에 수평계를 띄우는 이유는, 오답을 적어내면 죽는 사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미나님이 어제 기고한 칼럼에 공감이 많이 된다
특히 이런 글을 읽으면 내 스물두살쯤이 떠오른다 그때만큼 폭발적으로 취향을 쌓으려고 노력했던 시기가 없는거 같아서(이 계정도 이 때 만들었고)
일에 치여 새로운걸 좋아하기도 지칠 땐 취향을 만들어준 그 시기에 빚을 진거 같단 생각을 종종 함
스트레스 슬리퍼(stress sleeper)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자버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잠을 자는 게 정서적 충격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수면시 기억이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기억의 자발적 인출은 늘어나는 반면 비자발적 인출은 줄어들어, 원치 않는 침투사고가 줄어들 수 있다고.
확실히 점점 깨닫게 되는 것들:
- 필요없는 게 들어있는 묶음할인보다는 조금 더 비싸더라도 내가 필요한 것만 사는 편이 낫다
- 소비할 수 없는 양의 대량상품보다 소비할 수 있는 조금만 사는 게 낫다
- 어중간한 저가상품보다 퀄리티가 보장된 걸 사는 게 낫다
- 다 알아도 1+1은 못 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