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투표함, 역사라는 가장 서늘하고 잔혹한 채점관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은 종종 인간의 투쟁을 거창한 이념의 언어로 낭만화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의 군중들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숭고한 깃발을 흔들었지만, 그들을 광장으로 내몬 진짜 동력은 텅 빈 국고와 폭등하는 빵값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역시 마르크스의 난해한 자본론이 아니라, 당장 굶어 죽어가는 농민들의 텅 빈 위장이 빚어낸 핏빛 폭발이었다.
인간은 거창한 도덕과 이념의 구호를 내걸고 혁명을 완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거대한 체제 붕괴의 밑바닥을 흐르는 가장 본질적인 마그마는 언제나 '경제적 고통'이었다.
우리의 현대사도 이 차갑고 정직한 인과율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좌파 진영은 늘 1960년의 4.19 혁명이나 1979년의 부마항쟁을 오직 '민주주의를 향한 순결한 열망의 승리'로만 독점하고 포장하려 든다. 하지만 그 감성의 거품을 걷어내 보라.
4.19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3.15 부정선거였으나, 그 불길이 온 나라를 맹렬하게 집어삼킬 수 있었던 기저에는 전후의 극심한 경제 불황과 대중의 절대적 빈곤이 깔려 있었다. 부마항쟁 역시 겉으로는 유신 체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었으나, 그 실질적 트리거는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 폭등과 지역 경제의 붕괴가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의 토대가 무너져 내리는 경제적 공포, 그리고 내 밥그릇을 비워버린 주제에 주권마저 도둑질하려는 권력을 향한 민중의 항의. 그것이 대중의 인내심을 끊어버리는 역사의 가장 일관된 방정식이다.
지금 이재명 정권이 마주한 대한민국의 풍경이, 바로 이 뼈아픈 붕괴의 역사적 데칼코마니다.
1,550원 선마저 맥없이 뚫려버린 환율의 붕괴,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증시의 폭락. 과거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급의 공포가 도래했음에도, 권력은 이를 두고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나 '중동발 대외 변수' 탓을 하며 변명하기 바쁘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은 얄팍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진실은 한없이 차갑고 명확하다. 이 거대한 경제적 발작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직 표를 사기 위해 국가의 곳간을 헐어버린 이재명의 얄팍한 포퓰리즘이 빚어낸 완벽하고도 필연적인 인재(人災)다.
치솟는 환율을 방어하고 통화 가치를 지켜내는 경제학의 교과서적 해법은 단순하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좁히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고, 시중에 풀리는 유동성(M2)의 수도꼭지를 단단히 틀어막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는 금리를 올릴 수 없는 치명적인 딜레마에 갇혀 있다. 공식 통계로만 1,900조 원, 전세보증금까지 합치면 3,000조 원에 육박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 뇌관 때문이다. 금리를 올리는 순간 한계 상황에 내몰린 서민과 영끌족, 자영업자들이 연쇄 도산한다는 것이 경제 관료들이 내세우는 처절한 방어 논리다.
백번 양보해 그 고육지책을 인정한다 치자. 통화 정책의 손발이 묶여 있다면, 상식적인 정부가 취해야 할 최후의 방어선은 빚을 내서 허공에 무지성으로 돈을 살포하는 '재정 중독'만큼은 결사적으로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반대의 길로 폭주했다. '기본소득', '민생 회복 지원금', '고유가 피해 지원금'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얄팍한 간판을 내걸고, 수십조 원이 넘는 현금을 윤전기로 찍어내 대중의 입에 쑤셔 넣었다. 금리는 묶어둔 채 화폐의 공급량만 미친 듯이 늘려대니, 원화의 가치가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고 환율이 1,550원을 뚫고 하늘로 솟구치는 것은 초등학생의 산수 실력으로도 예측 가능한 인과율이었다. 그 결과 국가채무는 1,415.2조 원을 가볍게 돌파했고, GDP 대비 채무비율 50%라는 마지노선마저 무너지며 미래 세대의 등에 거대한 폭탄을 지워버렸다.
여기에 이 나라의 숨통을 진짜로 끊어놓을 가장 서늘한 뇌관은 따로 있다. 바로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와 텅 비어버린 '국가 전략 비축유'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고조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고, 전면전 발발 시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핏빛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원유 수입의 72%를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이는 사망 선고와 같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순수입량의 90일 치 이상을 비축하도록 강력히 권고한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은 단기적인 국내 유가 불만을 덮고 선거용 인심을 쓰겠다며, 국가 생존의 최후 보루인 이 '전략 비축유'를 찔끔찔끔 빼 쓰며 아슬아슬한 최저치로 추락해 버렸다. 비상시 국가를 지탱할 비축 일수는 아슬아슬한 최저치로 추락했다.
자국의 상선에 이란의 대함 미사일이 꽂혀도 "고의성을 모르겠다"며 비굴하게 엎드리는 아마추어적 굴종 외교는, 국제 사회의 에너지 안보 공조망에서 대한민국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껍데기뿐인 반미 자주 외교를 떠들며 레드팀에 윙크를 보내는 사이, 국가 경제의 혈관인 원유 수급망을 스스로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완벽한 안보적 자해극이다.
1,550원의 환율,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국인 자본, 1,200조 원의 국가채무, 아슬아슬한 원유 비축량, 신선식품 물가도 불안하다.
이것이 그들이 맹신하는 "일 잘하는 이재명"이 남긴 건조하고도 완벽한 팩트다. 그는 결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존과 권력 연장을 위해 국가의 자본을 탕진하고, 비상용 비축유마저 헐어 쓰며, 미래 세대에 천문학적인 빚을 떠넘기는 '파괴의 기술'에 능할 뿐이다.
가난한 자를 돕겠다며 쥐여준 그 알량한 지폐 몇 장은, 결국 잔혹한 인플레이션과 고환율로 돌아와 서민의 밥상 물가를 폭등시키고 지갑을 털어가는 가장 악랄한 '빈자의 세금'으로 돌아왔다. 모니터 속 붉게 물든 증시와 1,550원이라는 환율 전광판이, 이 나라의 경제가 지금 얼마나 서늘한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는지를 차갑게 경고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의 수출 실적 뒤에 숨어 유능한 행정가 행세를 하지만, 실물 경제의 지표를 들이대는 순간 그 얄팍한 환상은 이토록 손쉽게 산산조각이 난다.
'우연히도' 선거가 끝나자 고삐풀린듯 올라가는 환율에 우파 텃밭에서만 핀셋으로 집어낸 듯 증발해버린 투표용지, 권력의 눈치를 보며 헌법을 찢어버린 선관위. 6.3 지방선거에서 벌어진 이 사상 초유의 참정권 압살 사태는, 과거 3.15 부정선거의 가장 기괴하고도 세련된 21세기적 변종이다.
저들은 잠실 투표소 앞의 시위대를 경찰의 방패로 밀어내고 개표를 강행하면, 이 소란이 며칠 뒤 유야무야 가라앉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팍팍한 밥상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짓밟힌 주권에 대한 모멸감이 융합되었을 때, 그 거대한 파도가 권력의 숨통을 어떻게 끊어놓는지 저들은 역사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 이 사태는 결코 경찰의 군홧발로 덮을 수 있는 얕은 불씨가 아니다.
더욱 서늘한 것은, 이재명 정권을 향해 날아들 진정한 악몽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적 억압은 견뎌도, 텅 빈 지갑과 빼앗긴 표의 교집합만큼은 결코 참지 않는 것이 대중의 차가운 속성이다.
바닥난 금고, 증발한 비축유, 다가오는 미국의 301조, 그리고 투표함. 권력의 무덤을 파는 가장 완벽한 원소들이 지금 이재명의 발밑에 차곡차곡 쌓였다. 경찰의 몽둥이 따위로 이 거대한 역사의 인과율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만을 넘어선 가련한 무지다. 바스티유의 횃불과 마산의 함성이 그러했듯 말이다.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시겠지만, 분쇄 원두를 담을 때 드리퍼를 손에 들고 하면 흘리지 않을 겁니다. 물을 가장자리 끝까지 채우면 커피를 통과하지 않은 물이 흐릅니다. 가장자리 저 커피가 댐 역할을 해 미분에 의한 필터 막힘을 방지할 수 있지요. 저 부분도 추출되니 아깝게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세차 끝났는데
고객님이 갑자기 계좌번호를 달라고 하셨다.”
출장세차 하다 보면
가끔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있다.
그날도 평범한 아파트 출장세차였다.
차량은 오래 관리 안 된 SUV였는데
벌레 자국, 물때, 실내 먼지까지 꽤 심한 상태였다.
근데 고객님이 작업 시작 전에
유독 한마디를 계속 하셨다.
“대충만 해주셔도 됩니다.”
“너무 힘쓰지 마세요.”
보통은 반대로
엄청 꼼꼼하게 해달라는 경우가 많아서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나는 평소처럼 작업했다.
땀 뻘뻘 흘리면서
벌레 자국 지우고
실내 틈새 먼지 빼고
유리 안쪽까지 마무리했다.
작업 끝나고 고객님 내려오셨는데
차 보시더니 한참 말이 없으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계좌번호 좀 달라고 하시는 거다.
솔직히 순간
“뭐 문제 있나?” 싶었다.
근데 고객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사실 저도 예전에 서비스업 했었거든요.
요즘 이렇게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 보기 힘들어요.”
그러면서 추가금을 보내주셨다.
근데 더 기억에 남는 건
그 다음 말이었다.
“돈보다
사장님 같은 사람은 오래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 말 듣는데
진짜 괜히 울컥했다.
살다 보면
돈보다 사람 말 한마디가
훨씬 오래 남는 날이 있다
태국의 아티스트이자 사진작가인 Akkara Naktamna의 작품 "In the Mood of Loss"...이 작품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한쪽이 먼저 무너지도록 만들어졌을 것 같다...서로 의지하던 누군가를 잃고 부재의 존재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부조리... 아마도 우리 삶의 가장 무거운 부분 중의 하나일것이다...
어느 날, 열정에 대하여
1990년대 초 난 어느 신문사의 초보 기자였다. 원대한 야망도 없이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면서 하루하루 시간만 보냈다. 어느 날 신문사 주최로 울산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취재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날 오후에는 비행기 티켓을 수령했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의 예매 티켓은 색색깔의 카본 복사지가 덧대어진 종이 묶음이었다. 나는 항공사에 다니는 형에게 비행기는 어떻게 타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버스 타는 거랑 똑같아. 티켓 들고 타면 되는 거야." 형은 그렇게 말했다.
공연 날, 아침 8시30분쯤 공항에 도착했다. 공연기획사 대표와 가수, 연주자 등의 일행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울산에서 공연은 오후 3시부터였고 티켓은 이미 매진이었다. 사람들은 다 즐거워 보였다. "왜 예매 티켓을 아직 들고 있어요?" 기획사 대표가 갑자기 놀란 얼굴로 물었다. 9시15분 출발 비행기였고, 시간은 8시5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 손에서 티켓을 낚아챈 대표가 발권 카운터로 달려갔지만, 이미 탑승 30분 전부터 미발권 티켓은 대기자들에게 번개처럼 분양됐다. 울산행 비행기는 하루에 딱 두대, 다음 비행기는 저녁 6시였다. 이미 바보라는 건 자명하게 알려진 상황이지만 나는 최대한 똑똑한 얼굴로 위장하고 말했다. "대표님은 일단 먼저 가서 공연을 진행해 주시고요, 저는 10분에 한대씩 있는 부산행 비행기를 타고 울산으로 가겠습니다."
주말 부산행 비행기의 대기 좌석은 쉽게 나지 않았다. 수십대를 보낸 끝에 2시가 다 되어서 겨우 탄 비행기는 3시쯤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택시를 타고 울산 콘서트홀로 가기를 주문했다. 택시 기사가 15만원을 불렀다. 김해·부산 일원의 토요일 오후 교통체증은 엄청났다. 택시는 어느 복잡한 시내 길로 들어가서 고가도로에 올랐고, 그 입구에서 기사가 구멍 난 깡통 안에 500원짜리 동전을 던져넣을 때쯤 이미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울산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는 5시 반을 넘어, 공연장은 휴일의 학교처럼 적막했다.
울산공항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7시였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가려면 그 비행기라도 타고 일행들을 만나야 했다. 택시 기사는 울산공항까지 다시 3만원을 불렀다. 공항 구역 안으로 진입하는데 게이트에서 경비가 우리를 세웠다. "계란입니다." 분명 경비가 그렇게 말했다. 미친 사람이 아닌가 했다. 그러잖아도 마음이 급한 사람에게 농담을 하는 건가? 아니면 양계장을 운영하며 부업으로 공항 경비를 해서 틈틈이 계란을 파는 것인가? 그를 무시하고 공항 청사 건물 앞으로 가서, 조용한 공항 건물을 보는 순간, 나는 비로소 계란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결항'이었다. 울산 사람들은 결항을 계란이라고 말했다.
택시 기사에게 다시 김해로 가자고 했다. 기사가 이번에는 깎아서 10만원에 태워준다고 했다. 오후 3시에 나를 만나서 그때까지 28만원째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거의 밤 9시였다. 혹시나 해서 둘러보니 공연 관계자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막비행기에 간신히 자리를 얻어 타고, 김포에 도착하니 10시 반이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와서 아무것도 한 게 없이 종일 비행기와 택시로 혼자 돌아다닌 꼴이었다. 내 실수로 추가 구매한 비행기값에, 택시비까지 더하면 그달 봉급도 이미 다 소진되었다.
그런데 공항 건물을 나와서 올라탄 버스가 강변도로의 가로등 사이를 꿈결처럼 떠갈 때, 이상한 뿌듯함이 가슴에 차올랐다. 아무것도 이룬 것은 없지만 그해 들어서 가장 열정적으로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 우리의 모든 성취가 언젠가는 사라진다면 결국은 절박하게 몰두하는 과정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강물은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다다른 꿈의 실체가 그날의 텅 빈 공연장처럼 허망한 것이었어도 거기에 다다르기 위한 나의 노력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했다.
꿈은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이고 열정은 현재이다. 매일 위치를 옮겨도, 꿈의 깃발이 보이기만 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달려갈 수 있다. 꿈은 열정을 위한 수단이다. 난 젊은 날의 꿈을 수십번 배반했지만, 옮겨진 깃발에 다다르기 위해 이리저리 필드를 헤매는 초보 골퍼처럼 착실하게 뜨거웠다.
어제는 입양의 날이다.
내가 21살때 부모님께서 1살 여아를 입양하셨다.
미혼모 쉼터나 영아원 등지에 봉사를 종종 갔기에
별 두려움이나 거부감없이 동생을 맞이했는데
바로 어머니께서 갱년기에 접어들고
아버지는 멀리 전근가시고
그 아이의 육아는 대학생이던 내 몫으로
오롯이 전달되었다.
데이트를 갈 때에도 아이를 데리고 다녔고
기저귀갈고 예방접종에 유치원 수업 참여에
ㅎㅎㅎㅎㅎ
그 시절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사고쳐서 애 낳은걸로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
어머니는 입양을 해서 아이를 키워내기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역부족인 사람이었고
결국 나는 결혼 이후까지도
여동생에 대한 끈을 이어가며 아이를 키워냈다.
(중고생 시절 모든 방학을 내 집에서 보냄)
(대학입시도 다 내가 해줌)
지금은 그 동생이 잘 자라서
여군 장교로 곧 임관하게 된다.
참 생각이 많아지는 입양의 날이다.
지금은 입양 기준이 매우 매우 엄격해져서
어지간한 집은 절대로 입양을 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
참, 누군가 나에게 묻더라
입양한 아이도 진짜 친동생같냐고
나는 피를 나눈 부모와 친형제보다
입양해온 동생이 더 끈끈하다.
낳은 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키운 정이 정말로 크다.
목에 칼 두 번 찔린 17살 학생한테
사람들이 한다는 말이
“왜 도망갔냐”랍니다.
진짜 이 사회가 어디까지 망가진 건가 싶습니다.
새벽 길거리에서
“살려달라”는 여학생 비명을 듣고
망설임 없이 뛰어간 것도 그 학생이고,
피 흘리는 학생 대신
119 신고하려다
흉기 든 범인과 맨손으로 맞선 것도 그 학생입니다.
한 손에는 휴대폰,
한 손으로는 칼을 막다가
손등이 찢어지고 목까지 두 번 찔렸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끝까지 지인에게 전화해
“사람이 칼에 찔렸다”고 도움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상황도 모르면서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다”
“상처 조금 입고 튄 거 아니냐”
이런 악플을 달고 있습니다.
사람이 목이 찔리고 피를 쏟는데
그 자리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고
비겁자 취급하는 게 정상입니까?
오히려 대부분 사람들은
비명 들어도 무서워서 못 갑니다.
저 17살 학생은
도망친 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살리려고 몸 던진 겁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남 도우려다 다친 사람한테까지
완벽한 영웅만 요구하게 된 걸까요.
저 학생이 부디
악플 때문에 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난할 자격 있는 사람보다
저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적을 겁니다.
최고의 아빠 권오중
아들이 7살 때 전 세계 15명, 국내 단 1명뿐인 희귀병 판정을 받음.
치료제와 치료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아들 곁을 지키기 위해 전성기임에도 드라마 출연 제의를 거절하고 먼 거리 촬영은 아예 가지 않음.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해 학사 및 석사 학위까지 취득함.
아들의 식습관 개선을 위해 요리를 배워 한식·양식 조리기능사 및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등 '자격증 부자'가 됨.
학교 폭력 등 어려운 상황을 견뎌낸 아들은 결국 그림 작가가 되어 해외 전시 초청까지 받으며 대학을 졸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