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는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 심지어 바다 건너 유학생들의 시국선언이 연일 울려 퍼지고 있다. 가장 어리고 힘없는 자들이 기어이 걸어 나와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이 벅찬 풍경 뒤로, 참으로 기괴한 적막이 흐른다. 평소 같았으면 이 광장의 헤드라이너를 장식하며 마이크를 쥐고 흔들었을 그 요란한 이름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했는가.
가장 먼저, 지성의 전당이라 불리는 상아탑의 찌질한 풍경이다.
과거 우파 정권의 사소한 흠결만 보여도 앞다투어 붓을 꺾는 비련의 지식인 흉내를 내며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얹어대던 그 고고한 대학교수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가. 교복 입은 어린 제자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의 압살을 탄식하며 피를 토하고 있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자들은 연구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단체로 시력을 잃었다.
헌정 질서가 짓밟히든 말든, 행여 이재명 정권과 좌파 지자체·교육감들이 내려주는 짭짤한 연구비와 용역 프로젝트가 끊길까 두려워 차마 입을 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건 제발 아니길 바란다.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계산기만 두드리는 지식 소매상들을 어찌 학자라 부르겠는가.
더 나아가 종교계와 법조계의 낡은 완장들은 한층 더 엽기적인 코미디를 선사한다.
광우병과 촛불 정국마다 가장 먼저 광장에 제단을 차리고 핏대를 세우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은 지금 어느 성당 지하에 웅크리고 계신가. 헌법기관이 주권자의 표를 훔치고 증거를 불태운 이 거대한 불의 앞에서는 갑자기 성수(聖水)가 말라버리기라도 했는가. 아군이 저지른 민주주의 파괴에는 철저히 눈을 감는 그 비루한 선택적 분노. 이쯤 되면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라 ‘정의구라사제단’, 혹은 ‘선택적 정의구현사제단’으로 정직하게 개명하시라. 진영의 유불리에 따라 묵언수행을 하는 사제복이라면, 그것은 종교인의 제의가 아니라 정치 브로커의 작업복이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던 ‘민변’의 행태는 얄팍함의 극치다. 시민의 참정권이 박살 나고 입술이 꿰매지는 현장을 목도하고도 권력을 규탄하는 그 흔한 성명서 한 장 내놓지 않는다. 일각에선 민변이 선관위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했다며 변명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역겹고 눈물겨운 '알리바이용 면피'다. 정권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할 성명서 배포는 없고, 훗날 "우리도 가만있진 않았다"고 변명하기 위해 가장 안전하고 무기력한 행정 서류 한 장 달랑 던져놓고 꼬리를 만 것이다. 그들도 이참에 ‘민주당을 위한 변호사모임’이나 ‘유사(類似) 민주사회를 위한 서류대행 모임’으로 간판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
권력의 감시자를 자처하던 ‘참여연대’는 정작 주권이 강탈당한 아스팔트 위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이재명의 눈치만 살피는 '방관연대', '침묵연대'로 쪼그라들었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때 비장한 텍스트를 남기며 분노를 뽐내던 ‘소셜테이너’ 연예인들 역시, 권력과 팬덤이 쥐여주는 '대본'이 없으니 단체로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고 꿀잠에 빠졌다.
‘정의’, ‘민주’, ‘참여’, ‘지성’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단어들을 이마에 박아놓고서, 정작 그 가치가 썩어빠진 선관위와 권력에 의해 능멸당할 때는 쥐구멍을 찾는 어른들. 말뿐이 아닌 진정한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꼿꼿한 시국선언문 앞에서, 잔뜩 몸을 사린 채 눈치나 살피는 꼴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을 담아야 한다. 얄팍한 정치색을 도덕과 지성으로 위장해 온 그 사기극의 유통기한은 끝난 듯 보인다. 부디 아스팔트에 선 어린 제자들과 학생들 앞에서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덜고 싶다면, 내일부터는 그 가증스러운 간판들부터 시원하게 내다 버리기를 건조하게 권한다.
평소 같았으면 건조하게 몇 마디 대화를 섞고 넘겼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알량한 지적 우월감을 뽐내던 객(客) 하나를 기어이 '또' 차단해 버렸다.
내가 6.3 지선 개표에서 쏟아진 '쌍둥이 득표' 현상을 무속 신앙에 빗대며 '부정선거'를 언급하자, 그는 득달같이 달려와 '지능'을 언급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대만 사례에서도 있었고 통계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우연인데, 왜 팩트 없이 선동하느냐"는 준엄한 훈계였다.
그래, 통계학자들의 말마따나 그 숫자 자체는 가능한 우연일 수 있다. 나 역시 글에서 인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둘러싼 국가 기관의 경이로운 야만성이다. 투표용지가 모자라 주권자를 내쫓고, 남의 지문을 프리패스시키고, 법원의 현장 검증 직전에 핵심 물증이 담긴 상자를 쓰레기차에 실어 불태워버린 선관위다.
심판이 대놓고 룰을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끔찍한 파행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데, 거기에 '통계적 기적'까지 더해졌다면 합리적인 시민으로서 당연히 거대한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대목에서 문득 헛웃음 섞인 한탄이 흘러나온다. 대체 왜 우리 보수만 늘 이토록 피곤하게 100% 완벽한 증거를 찾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산기슭을 어슬렁거려야 하는가. 범죄를 저지른 선관위가 '헌법기관'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밀실의 문을 걸어 잠가 수사조차 막고 있는데, 티끌 하나 없는 과학적 물증을 대령하기 전까지는 주권자가 의심의 돌멩이 하나 던지지 말고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토록 과학과 팩트를 사랑하시는 분들에게 건조하게 되물어보자.
과거 좌파 진영이 온 나라를 마비시켰던 그 거대한 선동의 역사 속에, 도대체 무슨 알량한 '과학적 근거'가 있었던가.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이라며 유모차를 끌고 나왔던 광우병 사태. 참외가 전자파에 튀겨진다던 사드 괴담. 소금을 사재기하던 후쿠시마 선동까지. 삼류 소설만도 못한 미개한 괴담과 무속 신앙 수준의 공포를 무기 삼아 국가의 숨통을 조일 때, 그들은 그것을 "대중의 합리적 불안"이라며 거룩하게 묵인했다.
그런 자들이 왜 선관위의 명백한 행정 파산 앞에 분노하는 우파 시민들에게만 갑자기 엄격한 노벨상 후보급 통계학자로 빙의하여 '지능'을 운운하는가. 이 지독하고 역겨운 내로남불 앞에서는 비웃음조차 아깝다.
물론, 우리 보수가 저 좌파 카르텔처럼 밑도 끝도 없는 괴담을 날조하고 덮어놓고 선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보수의 무기는 차가운 이성이어야 하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국가 기관이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증거를 태우고 있는데, "법적 증거가 없으니" 점잖게 중립 기어를 박고 헛기침이나 하자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비겁함'이다.
권력이 은폐하려 할 때, 의심은 주권자가 쥘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방어권이다. 그 의심의 목소리를 지능 탓으로 뭉개며 쿨한 척 선을 긋는 것은, 이 비정상적인 권력의 폭주를 방관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공범 선언일 뿐이다.
그러니 알량한 지능을 자랑하고 싶었던 그 점잖은 분에게 마지막으로 '뜨거운 안녕'을 남긴다.
당신의 그 뛰어난 지능은 잘 알겠으니, 부디 나처럼 촌스럽고 지능 낮은 사람의 글에는 얼씬거리지 말고 당신 수준에 맞는 고상한 곳에서 노시라. 국가의 헌정 질서가 개판이 되고 참정권이 짓밟혀도, 그 대단히 높은 지능 덕분에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아주 여유롭게 버티실 만한가 보다. 나라가 완전히 망해갈 때도 부디 그 고상한 중립, 끝까지 훌륭하게 지키시길 바란다.
@bobdylan318 잘못 알고 계신 듯합니다.
선생님의 트윗 글을 예로 들어봅니다. 여기에는 11개의 한자어가 있습니다. 使用 日常 漢字 單語 日本 生活 學術 語源 以上 努力 등입니다. 이 가운데 9개는 일제 강점기 이전의 우리나라 문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울 선거에서 30대 여성을 비롯한 2030 세대가 오세훈 후보를 지지한 것을 두고, 일부 정치인과 지망생들이 '청년 세대의 극우화'라거나 '여성들마저 극우가 됐다'는 무책임한 소리를 해댄다. 이런 소리는 자기 진영을 지키기 위한 정치권 관계자들의 비겁한 변명이거나,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청년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리려는 네임드 스피커들의 선동에 불과하다.
패배의 이유는 단순하다.
못해서, 그리고 못나서 진 것이다. 현 여당과 그 후보에게, 젊은 세대가 매력을 느끼거나 지지해야 할 유효한 이유가 없었던 것 뿐이다. 막막한 미래, 부족한 일자리, 치솟는 집값 속에서 여당은 청년들이 처한 경제적·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비전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현 여당 진영은 평범한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 추구, 생존을 위한 고민을 '이기주의'로 매도했고, 고민 끝에 진영을 넘어서는 선택을 '극우'라며 가스라이팅해 왔다.
더구나 정작 본인들이 내놓은 후보는 '술자리 폭행', '칸쿤 외유', '2차 강요' 같은 부도덕한 키워드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젊은 세대의 마음을 얻기를 바란단 말인가. 능력도 부족하고 모순된 진영이 겸허한 척, 잘난 척까지 멈추지 않으니 젊은 유권자가 등을 돌린 것이다.
많은 이들이 차마 현 여당은 못 찍겠고, 실제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정당을 찾다 보니 그게 제1 야당이었고, 그 당이 가진 여러가지 꼴보기 싫은 점들(윤어게인과의 절연 미비, 극성지지층)에도 불구하고 '에잇' 하며 찍었다는 걸 왜 외면할까. 망한 이유를 분석해서 나아지려면 이 '에잇' 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이 지점을 무시하고 세대와 성별을 싸잡아서 '청년극우' 니 '내란옹호'니 '2찍' 이니 하고 몰아대면? 당장 마음이야 편할지 모르나 앞으로 더 크고 더 고통스럽게 패배할 것이다.
나 역시 기성세대라 2030 청년들의 고통을 온전히 알 수도, 아는 척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정치권 언저리에서 마이크를 잡았다는 이들이, 갑자기 무슨 대단한 선지자나 된 것 처럼 '너희는 극우야' 하며 젊은 유권자의 선택을 모욕하는 모습은 역겹다. 자신들 진영의 모순과 과오를 가리고 정신승리를 하기 위해, 아니면 한 줌 진영 속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안 그래도 힘겨운 젊은이들의 선택을 '극우'니 '2찍'이니 '이대남'이니 하는 말로 매도하지 마라. 아니 계속 해라. 어떻게 되나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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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의 해명은 행정의 언어로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으나, 그 이면의 논리는 지극히 건조하고 투명하다. "무기한 직무 정지가 아니라, 징계위 의결 시까지만 유지되는 조치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 행정에서 '의결 시까지'라는 조건부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서랍 속에 처박아 두면 그것이 곧 완벽한 '무기한'이 된다는 뜻과 같다. 칼을 뽑아 들고서 내리치지도, 거두지도 않은 채 피의자를 기약 없는 대기 발령의 냉동고에 가둬두는 방식. 이것은 룰을 빙자해 사람을 말려 죽이는 가장 세련되고 비겁한 형태의 행정적 형벌이다.
돌이켜보면 이는 좌파 진영이 가장 능숙하게 구사해 온 주특기이기도 하다. 불리한 사법 리스크 앞에서는 온갖 핑계를 동원해 재판을 수년씩 지연시키며 법치의 시계를 멈춰 세우던 그 솜씨가 아닌가. 피고인석에서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끌며 방탄의 성을 쌓던 기술이, 이제는 이화영의 '연어 술파티'라는 삼류 소설의 실체를 파헤친 수사 검사를 묶어두는 징계의 덫으로 고스란히 이식되었다. 2년이든 3년이든 심사를 미루면 그만인 일이다.
그러나 이 사태를 지켜보며 진정으로 씁쓸함을 자아내는 지점은, 저들의 뻔한 지연 전술이 아니다. 이 명백한 보복 인사 앞에서도 철저히 방관자로 일관하는 이른바 보수 언론들의 차가운 계산기다.
언론들은 기사 제목부터 "쌍방울 불법 수사 의혹 박상용"이라며, 상대 진영이 짜놓은 악의적인 프레임을 앵무새처럼 받아 적고 있다. 대북송금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범죄를 입증해 낸 치열한 수사가 어느새 '불법'으로 둔갑하는 기괴한 프레임 전환 앞에서도, 보수를 표방하는 매체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 중립이라는 비겁한 뒤로 숨어버렸다.
더욱 얄팍한 것은 보수 진영 내부의 태도다. 초반에는 마지못해 방어하는 척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네가 알아서 싸워라"라며 거리를 둔다. 그 침묵의 기저에는, 박 검사가 이 투쟁을 견뎌내고 '제2의 한동훈'과 같은 새로운 상징으로 부상하여 자신들의 알량한 정치적 파이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치졸한 견제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거대한 불법 앞에서는 꼬리를 말면서, 혹여나 아군이 될지도 모를 이의 성장을 질투해 사지로 등 떠미는 이 지독한 뺄셈의 정치.
이재명의 범죄를 덮기 위해 국가 시스템이 동원되어 보복의 칼춤을 추고 있는데, 곁을 내어주어야 할 진영마저 밥그릇 계산을 하느라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춘 시계탑 아래 홀로 고립된 박상용 검사의 궤적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가 견뎌내고 있는 이 지난한 시간은 그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진실을 파헤친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우리 시대의 양심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덜어내고 건조하게 팩트만을 보더라도, 그는 법과 원칙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그에게 명확한 연대와 지지를 표명해야 한다. 그것은 일개 검사에 대한 개인적 동정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권력의 폭주와 내부의 비겁함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아야 할 '법치' 그 자체를 향한 지지다.
시간의 감옥에 갇혀 홀로 싸우고 있는 그에게, 당신이 서 있는 그 외로운 링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응원과 함께 단호한 마음으로 기록에 남긴다.
나는 힙합이나 요즘 예능에 큰 관심이 없다. 이영지라는 젊은 아티스트에 대해서도, 그저 알고리즘이 띄워준 짧은 클립 영상으로 우연히 몇 번 스쳐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파편적인 몇 장면 속에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누구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주관을 당당하게 내뱉는, 그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주체적이고 강단 있는 캐릭터. 만약 그녀가 선거를 앞두고 진짜 뚜렷한 정치적 소신을 담아 붉은색을 선택했던 것이라면, 그 어쭙잖은 사이버 테러 앞에서도 "내가 그딴 협박에 사과할 것 같으냐"며 콧방귀를 뀌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선거 며칠 전, 빨간 머리를 하고 붉은 옷을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좌파 성향의 맹신도들이 몰려가 사상 검증의 몽둥이를 휘둘렀다. 결국 이 자유분방한 아티스트는 부리나케 사진을 내리고, 하루아침에 머리를 까맣게 덮었으며, "무지하고 경솔했다"며 대중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의 흑발과 사과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문이 아니다. 생업을 쥐고 흔드는 맹목적인 군중의 폭력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황급히 써 내려간, 지독하게 비참한 '자아비판문'이다. 그토록 당당하던 청년조차 찰나의 고민 없이 무릎을 꿇게 만들 만큼, 저들이 뿜어내는 전체주의적 광기가 우리 사회의 일상을 얼마나 끔찍하게 옥죄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방증이다.
한국판 소분홍(小粉紅)들의 사상 검증이 참 갈 데까지 갔다.
가장 역겨운 것은 이들의 지독한 위선이다. 입만 열면 다원성, 개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를 떠벌리던 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정치적 과대망상 앞에서는 타인의 머리카락 색깔 하나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검열하려 든다. 색깔을 정치의 사유재산으로 독점하고, 대중의 취향과 일상마저 진영의 잣대로 난도질하는 사회를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미쳐 돌아가는 파시즘일 뿐이다.
아티스트가 머리카락 색깔 때문에 사상 검증을 당하고, 먹고살기 위해 황급히 흑발로 덮으며 자신의 무지를 탓해야 하는 나라. 자유로운 음악인조차 광기 어린 잣대 위에 올려 무릎 꿇리는 이 서늘한 야만의 시대를 보며, 나는 참담하게 묻게 된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나라는, 지금 대체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맞긴 한 것인가. 우리는 어떤 야만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공부 잘 한다'는 건 무조건 '학교공부를 잘 한다'는 말이었다. AI시대에 '공부'는 학교공부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학교밖에서 할 수 있는 공부가 무궁무진하다. 이제부터는 학교 공부를 잘 하는 것을 '공부 잘 한다'고 하지말고, '학교공부 잘 한다'로 콕 짚어서 말해야한다.
내가 들을 때 가장 당혹스러운 얘기가 이거다.
"그래도 이재명이 일은 잘하지 않나."
거리에서, 혹은 맹신적인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이 문장 앞에서는 깊은 탄식을 넘어 서늘한 절망감마저 든다. 아직 입틀막법이 시행조차 안했지만 공중파를 막론하고 레거시 언론마저 제 기능을 못하는 사이, 민노총에게 잡아먹힌 언론노조의 활약으로 마사지된 이미지라는게 이토록 해롭다.
숱한 사법 리스크 셀프 공소 취소 마저 선거 눈치를 보느라 지선 이후로 미뤄진 이 처절한 도덕적 파탄 앞에서도 지지자들이 마지막 방패처럼 치켜드는 이 기괴한 신화. 그러나 모호한 수사를 걷어내고 차가운 국가 지표의 숫자를 들이대는 순간, 그들이 맹신하는 유능한 행정가의 실체는 국가 시스템을 탕진한 무능한 포퓰리스트의 앙상한 민낯으로 전락한다. 숫자는 감정을 배제하며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그들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주식 시장의 지수를 보자. 겉보기엔 화려할지 모르나, 실물 경제의 지표는 정반대를 가리킨다.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1,060조 원을 돌파했고, 3곳 중 1곳이 빚을 갚지 못해 한계 상황에 몰렸다. 연간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90만 명을 넘어선다. 골목 상권이 피를 토하며 무너지는데, 시중에 살포된 현금잔치 유동성이 자산 시장으로만 몰려든 기괴한 디커플링(Decoupling)을 두고 '경제를 잘 돌린다'고 말하는 것은 완벽한 사기극이다.
부동산은 또 어떤가? 이재명식 통제 경제의 가장 처참한 실패작이다. 수요와 공급의 이치를 징벌적 세금과 규제로 틀어막은 결과,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10억 5천만 원 언저리에 고착화됐다. 월급쟁이 서민이 평생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을 모아도 집을 살 수 없는 철벽을 세워놓은 것이다. 전세 사기 여파로 빌라 시장마저 붕괴하면서, 서민들은 자산 축적의 사다리를 빼앗겼다.
이 모든 청구서는 결국 국가의 빚으로 쌓였다. 이재명 정권이 뿌린 돈이 1·2차 전 국민 지원금에 고유가 피해 지원금까지 온갖 명목을 바꿔가며 헬리콥터에서 살포한 매표용 현금의 총규모는 40조 원을 훌쩍 넘긴다. 그 대가는 참혹하다. 국가채무는 1,196조 원을 돌파하며 1,200조 원 고지를 뚫기 직전이고,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50.4%라는 위험선에 진입했다.
빚을 내어 권력을 산 결과는 잔혹한 인플레이션이다. 사과, 대파 등 신선식품 물가상승률이 20%를 넘나들고 외식 물가가 7% 넘게 뛰었다. 이재명이 공짜라며 쥐여준 그 알량한 지원금이, 사실은 밥상 물가를 폭등시켜 서민의 지갑을 털어간 가장 악랄한 역진세였음을 숫자가 증명하고 있다.
그나마 이 붕괴하는 국가 경제의 명줄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수출 지표다. 하지만 이마저도 속을 들여다보면 처참하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단 두 개의 반도체 거인이 전체 수출액의 20.4%를 견인하며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 착시 현상이다. 코스피 전체 상장사 영업이익 증가분의 80%를 반도체가 독식하고, 나머지 뿌리 산업의 생태계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대기업을 적폐라 조롱하고 '초과이익'을 몰수하겠다며 완장을 차면서도, 정권의 경제 성적표를 꾸밀 때는 그 적폐 기업 두 곳의 고혈에 철저히 기생하는 서늘한 모순이다.
환율과 에너지 안보 지표는 세계 시장이 이재명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주는 냉혹한 채점표다. 1,520원 선을 넘나들며 고공행진 하는 환율은 이재명 정권의 얄팍한 경제 운용에 대한 글로벌 자본의 차가운 불신, 즉 '자본 이탈(Capital Flight)'이 반영된 결과다. 여기에 진짜 서늘한 뇌관은 따로 있다. 중동 의존도가 70%가 넘는 현실보다 치명적인 것은, 참혹할 정도로 바닥난 국가의 '원유 비축량'이다. 단기적인 국내 유가 불만을 덮겠다며 국가의 최후 보루인 전략 비축유를 찔끔찔끔 빼 쓰며 탕진한 결과, 비상시 국가를 지탱할 비축일수는 아슬아슬한 최저치로 추락했다. 껍데기뿐인 반미 자주 외교를 떠들며 이란 미사일 앞에서는 고의성을 모르겠다며 엎드리는 자들이, 정작 국가 생존의 혈관인 에너지 비축고는 바닥을 긁게 만든 완벽한 안보적 자해극이다.
경제뿐만이 아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최후의 보루인 치안과 사법 시스템마저 철저히 붕괴했다. 권력형 비리 수사를 막으려 무리하게 밀어붙인 '검수완박'의 청구서를 보라. 수사 인력난과 병목 현상으로 6개월 이상 결론을 내지 못한 장기 미제 사건이 무려 9만 6천 건으로 폭증했다. 연간 32만 건의 사기 범죄가 발생해 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지만, 범죄자 구속률은 바닥을 친다. 권력자의 방탄을 위해 국가 사법망을 망가뜨린 결과, 대한민국은 사기꾼들이 보란 듯이 활보하는 '사기 공화국'으로 전락해버렸다.
자영업자 빚 1,060조, 서울 중위 아파트 10억 5천, 국가채무 1,196조, 살포된 지원금 40조, 신선식품 물가 20% 폭등, 환율 1,520원, 바닥난 원유 비축량, 연간 사기 범죄 32만 건.
이것이 그들이 맹신하는 "일 잘하는 이재명"이 남긴 건조하고도 완벽한 팩트다. 그는 결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국가의 자본을 탕진하고, 비축유를 헐어 쓰며, 미래 세대에 빚을 떠넘기고, 사법 시스템을 파괴하는 얄팍한 기술에 능할 뿐이다. 이 끔찍하고 구체적인 숫자 앞에서도 여전히 "일은 잘한다"는 잠꼬대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지적 태만을 넘어 국가 파멸에 동조하는 공범의 맹신일 뿐이다.
근데 이재명은 대통령이라는 계급장 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법을 대놓고 위반해도 아무런 제지 없이 유유히 재기표하고 걸어 나왔음. 국민들에게 "법은 너희 같은 서민들이나 지키는 거지, 나 같은 최고 권력자는 예외다"라는 지독한 특권 의식과 내 맘대로 할 거라는 시그널을 라이브로 보여줌.
병실은 인간이 가장 나약해지는 공간이다. 질병 앞에서 육체는 통제력을 잃고, 얇은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배변과 환부의 노출, 고통의 신음이 날것 그대로 교차한다. 그 좁고 삭막한 침대 위는, 병든 인간이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수치심과 존엄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최후의 보루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의 보건복지부가 이 알량한 보루마저 기어이 허물겠다고 나섰다. 남녀 입원실을 구별해 운영하도록 한 규정을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명분은 기가 막히게도 병상 자원의 효율적 운영이다. 빈 침대가 아까우니 성별을 따지지 말고 환자를 끼워 넣겠다는 뜻이다.
이 정책을 기획한 자들의 머릿속에 환자라는 살아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엑셀 표 위의 숫자이자, 빈칸이 생기면 구겨 넣어야 할 테트리스 블록일 뿐이다. 남녀가 섞인 다인실의 밤을 상상해 보라. 낯선 이성의 거친 숨소리와 체취가 뒤섞인 공간에서, 얇은 천 쪼가리 하나에 의지해 소변통을 비우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환자의 공포와 수치심을 효율이라는 얄팍한 단어로 덮을 수 있는가. 범죄의 위험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은 의료 서비스가 아니라 인간을 사육장의 가축 취급하는 서늘한 폭력이다.
이 기괴한 탁상행정은 이재명 정권과 좌파 진영이 세상을 바라보는 끔찍한 세계관을 정확히 관통한다. 그들에게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존엄은 늘 국가의 효율과 통제 앞에서 가장 먼저 거세되어야 할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개인의 수치심 따위는 국가가 뭉개고 가도 된다는 그 오만한 전체주의적 발상이, 이제는 국민의 가장 은밀하고 취약한 병상 위까지 완장을 차고 밀고 들어온 것이다.
어린이 병동이나 부부 간병 같은 특수한 상황이 문제라면, 그것은 지침의 세부적인 예외 조항으로 정교하게 풀어내면 될 일이다. 그 귀찮은 행정적 디테일을 고민하기 싫어 아예 남녀 구분의 원칙 자체를 날려버리겠다는 것은, 게으름을 넘어선 미필적 고의의 야만이다.
때로는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국민을 돕는 유일한 길일 때가 있다. 무능한 권력이 무언가 실적을 내겠다며 부지런을 떨기 시작할 때, 평범한 시민의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고 존엄이 어떻게 능멸당하는지 우리는 지금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병들고 아픈 국민을 행정 편의주의의 제물로 삼으려는 이 끔찍한 남녀 혼숙 병실 기획. 제발 부탁이건대, 그 알량하고 기괴한 행정의 칼날을 거두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라.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것이, 이 권력이 국민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복지이자 유일한 선행인 시대다.
어젯밤 11시, 모두가 잠자리에 들 무렵 열린 서울시장 심야 토론회에서 나는 기어이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철학적 명대사를 하나 건져냈다.
"진행하면 진행하는 대로 진행이 될 것이다."
정원오 민주당 후보의 입에서 이 경이로운 문장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것은 칸트의 정언명령인가, 아니면 노자의 무위자연인가. 아니면 그냥 뇌에 과부하가 걸려 블루스크린이 떠버린 챗GPT의 환각 증세인가.
1천만 메가시티 서울의 복잡한 현안을 묻는 링 위에서, 시장이 되겠다는 자가 "숨을 쉬면 숨이 쉬어질 것이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를 것이다" 수준의 기적의 동어반복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정책의 디테일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자리에서 튀어나온 저 텅 빈 깡통 구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헛웃음을 넘어 일종의 숭고함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대체 머릿속에 든 게 얼마나 없으면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조차 이토록 처참하게 길을 잃는단 말인가.
이 기막힌 선문답을 듣고 나니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린다. 왜 그토록 토론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는지. 그리고 마음씨 고운 선관위가 왜 하필이면 유권자들이 가장 TV를 안 볼 평일 밤 11시에 이 토론회를 야반도주하듯 꼭꼭 숨겨주려 했는지. 그 눈물겨운 호위무사들의 과잉보호가 이제야 납득이 간다. 대본이 사라진 링 위로 끌어올려지는 순간, 자신들의 후보가 '득도한 앵무새'로 전락할 것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밤 11시의 어둠 속에 숨겨주려 했던 민주당 참모들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겠으나,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덜컹거리며 박살 나는 이 꼴이 꽤나 즐거운 심야의 안줏거리였다.
어쩌겠는가. 본인의 실력이 탄로 났으니, 이제
"낙선하면 낙선하는 대로 낙선이 될 일만 남았다."
<혹시 쫄았습니까?>
이번 주 일요일 토론회, 섭외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공소취소를 반대하는 쪽에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 포함 다수의 논객들이 섭외에 응해주셨지만 민주당 이하 공소취소를 찬성하는 정치인들은 토론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정치중립의무를 지켜야 하는 정유미, 박상용 검사 보호 차원에서 국힘 의원들도 출연 배재시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국회 내규에 따른 주최자 최수진 의원은 예외)
정원오 후보도 그렇고 민주당은 왜 이렇게 토론을 피하는 겁니까? 공개된 장소에서 당당하게 공소취소를 찬성할 용기는 없는 겁니까? 혹시 마지막 양심입니까?
설마 이래놓고 또 편향 어쩌고 하며 박상용 검사 괴롭히는 구실로 쓰지는 않겠지요?
#사람이라면?
"가자지구 가는데 이스라엘 영해를 지나야 돼요?"
어제 국무회의에서 이재명이 불쑥 던진 이 한마디는, 단순한 말실수를 넘어선 일종의 서늘한 공포물이다. 동네 호프집 취객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라면 그저 혀를 차고 넘길 일이다. 그러나 일국의 외교와 안보를 책임지는 최정점에 앉아 있는 자가 공식 석상에서 마이크를 쥐고 배설한 텍스트라면 이야기는 완벽히 달라진다.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의 지리적 고립과 이스라엘 해군의 전면적인 해상 봉쇄는 수십 년간 이어진 국제 정치의 뼈대이자 기본 상식이다. 왜 구호선단이 번번이 이스라엘 통제선에서 나포되고 국제적 마찰이 빚어지는지, 중동 지도를 단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거나 국제 뉴스의 헤드라인만 읽었어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끔찍한 질문이다.
이스라엘 정상을 향해 "체포" 운운하며 국제 인권 심판관 행세를 하더니, 정작 중동 지정학의 기초적인 물리적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팩트와 기초 지식이 결여된 자의 얄팍한 혓바닥이 얼마나 쉽게 국가의 외교 안보를 희화화하고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증명하는 가장 투명한 장면이다.
무지(無知)가 신념을 만나 권력을 쥐면 그 자체로 거대한 재앙이 된다. 지도 한 장 제대로 읽어낼 줄 모르는 이 참담한 지적 밑천을 목도하고도 여전히 맹목적인 환호를 보내는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건조하고도 뼈아픈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정도의 지식수준을 가진 사람에게, 진짜 이 나라를 맡겨도 되는 거냐고.
아마도 삼성전자 노조 파업에 긴급조정권 쓰기 위한 명분으로 한 말인듯 한데, 어떤 경우에도 국민 기본권은 제한당해선 안된다. 광주에서는 계엄군에 맞섰던 국민들 기리면서 같은 입으로 국민 기본권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을 하다니 모순을 넘어 공포스럽다. 이 모든 사단은 노란봉투법 때문이다.
현직 교사들과 하는 공부 모임이 몇 곳 있다. 선생님들 만날 때마다 아이들과 업무와 하루종일 씨름하고 퇴근한 뒤에 만난 선생님들 얼굴인가싶게 밝다. 아이들 얘기를 할 때는 더욱 빛이 난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나는 이 선생님들한테 힘을 얻는데, 선생님들은 이런 모임에서 힘을 얻는다한다.